대한민국이 반공을 국시(國是)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김일성의 남침 때문이다. 스탈린의 사주를 받은 괴뢰정권의 수괴 김일성이 원인 제공을 한 셈이다. 이승만·박정희는 공산세력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반공교육을 강화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 정부는 1955년에 ‘반공방일(反共防日·공산주의와 일본을 배격함)’을 내세운 1차 교육과정(55~63년)을 통해서 국민학교에서 연간 35시간 반공·도의 교육을 하게 했다. 뒤이어 박정희 정부에서는 반공교육이 한층 강화되어 반공은 승공(勝共)·멸공(滅共)으로 바뀌었다. 포스터 그리기·글짓기·표어 짓기·웅변대회가 수시로 벌어졌다.
대한민국 격랑의 현대사를 논할 때 5.16 혁명공약을 빠뜨릴 수 없다. 6개항의 ‘혁명공약’ 가운데 첫 번째가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1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인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 한다’였다.
5·16의 반공공약은 거사의 가장 중요한 명분이었다. 당시 4.19 학생의거로 들어선 민주당 정부 시기에 좌익세력이 모두 들고일어나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을 비롯한 각종 좌익단체를 결성하고, 학생 좌익들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기치를 내걸고 휴전선에서 남북학생회담을 하겠다고 나서는 판이었다.
이러한 용공적 사상혼란을 일소하고 경제개발을 강력하게 추진하여 기아선상에 놓인 민생고를 해결하고 조국의 근대화를 이룩하겠다는 절박한 심정이 군사혁명의 동인이었다. 그리하여 혁명공약의 제2항은 미국과 유대 강화, 3항은 부패 일소, 4항은 민생고 해결, 5항은 국력 배양, 6항은 과업 성취 후 군 복귀를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1987년 ‘6.29 민주화’를 거치며 ‘반공 국시’에 큰 변화가 생겼다. 이후 반공교육은 통일교육으로 바뀌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는 반공교육은 없었고, 북한과의 문화 차이나 통일 후의 모습 등을 교육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최근 좌파 국회의원들은 20대 청년들이 현 정권의 실정에 분노해서 민주당 지지를 이탈한 것을 있지도 않은 ‘보수 정권의 반공교육 탓’으로 돌렸다. 자기반성 없는 ‘네 탓이오’의 전형이라 하겠다.
좌파들은 보수 우파가 통일을 반대한다고 공격하고 있지만, 대한민국의 영구적 분단을 바라는 국민은 단 한 명도 없다. 보수 우파는 통일을 하되 헌법 제4조에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고 명시한 대로 ‘자유민주주의로 통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정은의 ‘핵개발-평화협정’ 전략의 목표는 주한미군 철수 및 한미동맹의 파기, 대한민국 흡수통일이다. 과거 좌파정권의 ‘퍼주기’에 힘입어 핵개발에 성공한 김씨 왕조의 핵협박은 ‘선(先)평화협정 후(後)미군철수’이다.
대한민국의 가장 큰 적(敵)은 북한도 중국도 아닌 내부의 적이다. 현 정부는 연방제가 헌법상 불가하니까 남북연합을 원하고 있다. 그러나 북핵 포기, 북한의 개혁·개방, 북한의 인권 개선과 민주화, 대남적화 포기 등의 전제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한 남북연합을 해서는 안 된다.
한국의 좌파 세력들은 반공을 비롯하여 한·일국교정상화, 베트남 파병, 고속도로 건설, 석유화학공업의 건설, 포항제철의 건설, 중화학공업화 등 ‘박정희정신’이 발현되는 고비마다 관련 정책에 반대했다. 반공은 대한민국 건국과 수호의 대전략이었다. 박정희는 “빈곤 탈출 없이는 반공이 성공할 수 없다”며 반공대전략의 내용을 경제개발로 채웠고, 그것은 마침내 성공했다.
현충일은 북한에 맞서 산화한 호국영령을 기리는 날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6월 6일 제64회 현충일 추념사에서 일제강점기 때 무장 독립 투쟁을 벌였으나 이후 월북해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한 김원봉을 ‘국군 창설의 뿌리’로 평가했다. 해괴한 논리이며 지하의 영령들이 통곡할 일이다. 이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무너뜨리는 위험천만한 발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