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는 “그처럼 자신이 없고 피해의식과 열등감에 사로잡힌 비굴한 생각이야말로 굴욕적인 자세”라며 반대자들을 설득했다. 우리 정부는 한일협정으로 10년간 무상 3억 달러, 공공차관 2억 달러를 제공받게 됐다. 금액보다도 물자와 인력의 교류 통로가 열렸다는 게 중요했다. 단기적으로는 일본산 자본재와 부품을 들여와 한국에서 조립해서 미국에 수출하는 ‘3각 무역체제’가 성립했다. ‘조립 가공형’ 무역과 산업의 탄생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마침내 한국 기업은 산업발전사(史)에 ‘극일(克日)의 역사’를 기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박근혜 정부가 타결한 국가 간 합의(위안부 합의)를 무력화했다. 지난해 10월 대법원이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내렸는데도 8개월 동안 외교적 해결 노력을 등한시하고 오불관언(吾不關焉)했다. 여권 인사들은 ‘토착 왜구’니 ‘칼 찬 순사’니 하면서 반일 포퓰리즘으로 보수 야당을 희롱했다.
미중 무역전쟁 와중에 한일 간에 반도체소재 전쟁이 벌어졌다. 일본 정부가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에 이어 한국을 아예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해 규제 대상을 전면 확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정치적인 문제로 촉발된 위기에 직격탄을 맞는 건 경제계와 국민이다. 한일 관계가 악화되면 한일 모두 손해를 보지만 더 큰 손해를 보는 것은 한국이다. 한국은 부품·소재·장비를 일본에 의존하고 있어, 한번도 (대일본) 무역흑자를 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한일관계는 1965년 국교정상화 이후 많은 갈등 속에서도 늘 미래지향적으로 발전해왔고, 한일관계가 좋았을 때 우리 경제도 좋았다. 한일협정 이후 역대 정부에서 위기도 있었지만 문재인 정부에서처럼 한일관계가 냉각된 적은 일찍이 없었다. 지금 한일관계는 1965년 국교정상화 이후 최악 상황이다. 북한 핵무장에 대응하는 한미일 군사 공조도 바람 앞의 등불이다. 한일 간 갈등은 안보적 측면이나 경제적 측면에서 득보다 실이 더 큰 만큼 양국관계의 조속한 정상화가 필요하다. 그것은 대통령의 책무다.
해공(海公) 신익희 선생은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활동, 건국 등의 과정에 모두 참여한 민주당의 시조 격이다. 초대 국회에서 민주당의 시초인 대한국민당(민주국민당, 민주당으로 개명)을 창당한 진보의 아버지다. 아이러니 하게도 누구보다 독립에 헌신했던 그는 해방 후 한때 친일분자로 매도당했다. 1956년 대선을 앞둔 시점에 당시 민주당의 대선 후보 해공은 한 강연회에서 “만약 내가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일본 지도자들과 회담할 용의가 있다”고 주장했다. “한·일 양국 정부는 무엇보다 먼저 부당한 감정을 청산해야 한다”고도 했다. 이 발언이 친일분자로 공격받는 빌미가 된 것이다.
또한 장면 총리는 ‘한국의 경제개혁 비망록’을 작성해 미국 국무부에 전달했다. ‘경제개발 5개년계획’ 구상을 밝힌 이 문서에는 물자 부족 문제 해결을 위해 대일무역 확대를 추진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일본과 국교 정상화를 시도할 테니 미국이 도와달라는 메시지였다. 이 계획서는 박정희의 핵심 경제정책인 ‘경제개발 5개년계획’ 수립의 방향등이 되었으며, 1965년 한·일 협정의 마중물이 되기도 했다. 이처럼 우리나라 진보의 설계자인 해공과 장면은 일본에 대해 실용주의에 입각해서 극일(克日)·용일(用日)하려 했다. 그런데, 그들의 진보 적통을 이어받았다고 자부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친일 잔재 청산’ 강조는 ‘관제 민족주의’다. 반일(反日) 혐일(嫌日)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 문 대통령의 외교관(外交觀)이 애처롭다.
한·일 갈등을 국내 정치에 이용하는 것은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이다. 미래를 내다보고 국익을 생각해야 하다. 문 대통령과 아베 총리는 반일·혐한 감정을 버리고 이성에 입각해 신속히 양국 관계를 복원해야 한다. 문 정부는 1965년 한·일 기본조약과 청구권 협정의 ‘유효성’을 재확인해야 한다. 그것이 국제사회에서 소외되고 무시당하지 않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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