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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정치신문

노무현 전 대통령 10주기/ 세상이 그를 첫사랑처럼 추억하..
정치

노무현 전 대통령 10주기/ 세상이 그를 첫사랑처럼 추억하고 있는 까닭은?

김경홍 기자 입력 2020/05/20 14:50 수정 2020.05.20 14:50

[경북정치신문=김경홍 기자]  “너무 슬퍼하지 마라 /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이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산 너머 여명(黎明)이 새벽잠을 깨우던 2009년 5월 23일, 마치 한 소절의 시구(詩句) 같은 유서를 마감한 노무현 전 대통령은 봉하마을 뒷산으로 향했다. 새록새록 솟아나는 들풀에 남긴 그날의 흥건한 발자취가 생의 마지막이었음을 누가 알았겠는가.

그 당시 노 전 대통령은 재임 중 친인척 비리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었다. 잠을 이룰 수 없는 나날이었고, 심신을 파고드는 고통은 날이 갈수록 무게감을 더해갔을 것이다. 그래서 생의 마지막 순간, 삶의 끝자락에 남긴 유서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 2009년 5월 25일 구미시청 4층 대강당에 마련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분향소를 찾은 소녀가 울먹이고 있다. 사진 = 김경홍 기자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 없다/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2009년 5월 23일 6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자, 세상은 충격에 휩싸였다. 그에겐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이었지만, 세상은 하직하는 그를 품어 안으려고 땅을 쳐댔다. 7일간의 국민장 동안 가고 없는 그를 기리는 추모행렬이 봉하마을과 전국 각지에 차려진 시민 분향소로 물밀 듯 밀려들었으니 말이다.


↑↑ 노무현 전 대통령. 사진 제공= 노무현 재단 캡처

그해 5월 25일에는 구미시청 4층 대회의실과 해평 도리사에도 분향소가 마련됐다. 그곳으로 향하는 추모객들의 눈빛에는 석별의 아쉬움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눈물은 진보와 보수, 남녀노소를 넘나든 그야말로 ‘사람사는 세상’그 자체였다.

돌아보면 어느덧 무상의 세월 10년, 그렇다면 짧지 않는 세월의 풍파 속에서도 세상이 그를 놓아주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 2009년 5월 25일 구미시청에 마련한 분향소를 찾은 어린이. 사진= 김경홍 기자

노 전 대통령은 원칙을 바탕으로 한 국민들의 신뢰를 무엇보다도 중요시했다. 특히 열린 마음으로 상대의 인격을 존중하는 가치관을 국정철학의 기본으로 삼은 그는 약자와 소외계층에 깊은 애정을 남겼다.

이러한 철학을 근간으로 한 노 전 대통령은 사회적 약자인 노인과 저학력자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특히 차별 철폐와 함께 가난하고 어렵게 사는 서민들이 홀대받고 설움 받지 않는 세상을 위한 첫 단계로써 사회복지 체계를 재정비한 치적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그 핵심이 바로 가난한 이들에게 세금감면 및 의료비를 국가가 보장해 주고 누구나 빈부 격차 없이 중병이 든 경병이든 국가가 책임지고 의료비를 책임질 수 있도록 한 의료 정책이었다.

↑↑ 2009년 5월 25일 구미시청 4층에 마련한 분향소. 사진= 김경홍 기자.

그의 이러한 국정 운영 철학의 일단은 노 전 대통령의 어록의 이랑 속에 고스란히 심어져 있다.

“투명한 정치, 투명한 사회가 공정한 사회를 만들고 한 사람보다 열 사람의 아이디어가 좋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2004년 11월 무역의날 무역협회 부설 무역아카데미 연설)

“최고의 기술은 ‘내가 상대를 믿고, 상대가 나를 믿게 하는 열린 자세’로 상대를 존중해야 하며 끊임없이 사물에 대한 관심을 갖고 내가 만나는 사람에 대해 애정과 관심을 보이고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2004년 1월 대통령비서실 직원 연수 특강)

노 전 대통령의 이러한 인간 존중 사상의 근간은 ‘착한 사람이 이긴다는 믿음을 물려주자“는 철학으로부터 비롯됐다. 그래서 2001년 12월 대선 출마 선언문은 몇 번을 읽어도 감동의 물결을 일으킨다.

“그저 밥이나 먹고 살고 싶으면, 세상에서 어떤 부정이 저질러지고 있어도 어떤 불의가 눈앞에 저질러지고 있어도 강자가 부당하게 약자를 짓밟고 있어도 모른 척하고 고개 숙이며 외면해야 했습니다... 저희 어머니가 제게 남겨 주셨던 저희 가훈은 ‘야 이놈아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눈치 보며 살아라’였습니다.
80년대 시위하다 감옥 간 우리 정의롭고 혈기 넘치는 우리 아이들에게 그 어머니들이 간곡히 간곡히 타일렀던 그들의 가훈 역시 ‘야 이놈아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그만둬라. 너는 뒤로 빠져라’였습니다.
이 비겁한 교육을 가르쳐야 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이 역사를 청산해야 합니다. 권력에 맞서서 당당하게 권력을 쟁취하는 우리의 역사가 이뤄져야만 떳떳하게 불의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노 전 대통령의 삶은 불의와의 싸움, 강자 앞에 강하고, 약자 앞에 약한 삶의 연속이었다. 1998년 12월 31일, 청문회에 나온 전두환 전 대통령이 끝까지 묵비권을 행사하다가 퇴장하려고 하자, 돌아서는 그를 향해 명패를 던진 것도, 정주영 전 현대 그룹 회장을 상대로 한 1998년 5공 비리 청문회 당시 정 회장의 눈시울을 붉히게 만든 것도 노 전 대통령의 애끓는 강단(剛斷)이었다.

부산상고 졸업과 건설 현장 노동자, 사법시헙 합격, 판사 임용 후 사직, 인권 변호사라는 외길을 걸어온 노 전 대통령. 10년이 흐른 지금도 세상이 그를 깊이 추억하고 있는 까닭은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한 삶을 일관되게 이어가면서 ‘ 사람 사는 세상’의 이랑에 사회적 약자의 삶을 파종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가도 사랑은 남는다‘는 예술적 가치를 현실로 보여준 이가 바로 바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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