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정치신문=서일주 기자] 22세의 꽃다운 청년인 황진박은 1910년 조선이 일본에 합병되자, 책장을 박차고 나와 구국 투쟁의 길로 들어섰다. 1888년 4월 7일 그를 낳은 고향 구미시 산동면 성수리를 뒤로한 그는 약장사로 변신해 뜻있는 동지를 규합하기 위해 전국 각처를 누볐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서울로 상경해 구국 투쟁을 벌이면서 애국심을 다진 그는 귀향해 장진홍(독립장 추서), 이내성(애국장), 김기용(애국장), 박관영(미서훈) 등과 1920년대 초 구미지역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하지만 평화적인 시위만으로는 독립의 뜻을 이룰 수 없다고 절감한 황진박은 무장투쟁을 통한 구국 투쟁에 나서기로 결의했다.
가장 먼저 정한 무장 투쟁의 타깃은 대구의 주요 기관인 도청과 경찰부 조선은행 대구지점, 석산은행 대구지점 폭파였다. 김기용이 주선으로 화약을 구해 폭탄을 제조한 결사대는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을 첫 타깃으로 삼았다. 당시 폭탄을 던진 이는 장진홍이었다.
한동안 잠적해 있다가 장진홍과 현해탄을 건넌 그는 일본에서 조선 노동자를 상대로 권익을 위한 투쟁과 구국 사상을 불어넣는 운동을 전개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된 옥고를 치러야 했다.
하지만 구국 투쟁은 지속됐다. 이후 동지들을 규합해 주요 기관을 폭파하려고 했으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이 있은 지 2년 만에 밀고를 당한 황진박은 장진홍과 함께 경찰에 다시 붙잡혀야 했다. 하지만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다. 대구 복심법원에서 폭발물 단속 및 살인 예비죄로 1년 6개월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고 있는 유치장에서 함께 옥고를 치르던 장진홍이 갑자기 사망한 것이다.
분개한 황진박은 감옥 안에 갇혀있던 동지들을 규합해 옥문을 부수고 나와 독립 만세를 외치며 장진홍의 사인을 밝히려다가 다시 건조물 파괴죄로 8개월의 옥고를 더 치러야 했다.
이어 대구 형무소에서 짧지 않은 3년의 옥고를 마친 그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구국단을 결성해 구국 투쟁을 전개하려고 했으나 일본 경찰에 붙잡혀 1년 6개월의 옥고를 다시 치러야 했다.
1910년부터 1942년 5월 26일 세상을 떠나기까지 30여년 동안 그가 옥고를 치른 세월은 5년여였다.
◇ 78기 추모식
황진박 선생이 세상을 하직한 후 정부는 공적을 인정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또 그의 애국혼을 기리는 노력은 지속되고 있다,
민족문제 연구소 구미지회(지회장 이수연)는 지난 26일 옥고의 후유증으로 애국의 길을 살다가 세상을 떠난 황진박 선생의 뜻을 기리는 추모식을 산동면 인덕리 산 28-1번지에 위치한 선생의 기념비 앞에서 엄숙하게 진행했다.
젊은 나이에 서울로 상경해 3•1만세 운동에 참가한 후 평화적인 시위만으로는 독립을 이룰 수 없다는 현실 앞에서 동지들을 규합해 무장 독립투쟁을 이끈 황진박 선생.
아직도 일본은 우리나라에 대해 경제 제재를 가하고 있고, 독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은 물론 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에 대한 사과를 뒷전으로 하고 있다. 선생의 애국혼이 더욱 가슴에 와 닿는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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