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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정치신문

좌익과 우익에 편승한 "구미지역 일부 여론주도층·원로들"..
오피니언

좌익과 우익에 편승한 "구미지역 일부 여론주도층·원로들", 안타깝다..."이 순간에도 정체성을 잃어가며, 갈 곳을 잃어가고 있다"

이세연 기자 입력 2024/12/30 13:52 수정 2024.12.30 13:59
- '좌익과 우익' 개념은 분단역사가 만들어 놓은 수구세력의 통치철학 (국민을 군중으로 경시하는 시각)
- ‘짐승의 무리처럼 쏠려 다니는 군중에서 벗어나 자신이 의지 따라 길을 가는 민중으로 거듭나냐
- 중도를 제시할 혜안이 없으면 침묵이 답
- 화가는 그림으로, 기자와 문인은 글로, 가수는 노래로써 가치관 설파해야

‘자신이 최고이며 진실이다’라는 소위 일부 지식인·종교인·시민단체의 선민의식은 퇴출 되어야 한다. 이 순간에도 정체성을 잃어가며 갈 곳을 잃어가고 있다.

[경북정치신문/k문화타임즈 공동 칼럼= 경북정치신문 발행인 이관순] 청년기를 넘보던 1970년대, 대학생이던 S형은 술만 마시면 이민을 자주 얘기하곤 했다. 싸움판을 벌이는 한국사회가 싫다는 게 이유였다. 당시 필자는 그를 도피자로 분류했다. 

 

독재라는 황무지를 갈아엎은 이랑에 민주의 꽃을 피울 생각은커녕 남들이 피땀 흘려 가꿔놓은 민주의 땅으로 건너가 숟가락을 얹혀 놓겠다는 발상이 밉기만 했다.

청년기에는 일제 강점기를 살다간 작가들의 작품을 종종 읽곤 했다. 릴리시즘적 서정주의는 그렇다 쳐도 염세주의에 함몰된 작품을 읽다 보면 분이 치밀기 일쑤였다.

 
이들은 대부분 당시를 살다간 건전한 지식인과 원로사회의 비판 대상이었다. 또 그 비판은 사회적 공감을 얻었다. 일제 강점기에서의 독립 쟁취와 독재주의 사회에서의 민주 쟁취는 대부분의 건전한 지식인과 민중이 갈망하는 지향점이었다.

 
돌아보면 당시의 지식인과 원로만큼 정신적으로 편안한(?) 시절도 없었던 것 같다. 독립과 민주는 소위 칸트가 말하는 정의의 범주였고, 대다수 국민이 갈망하는 꿈의 영역이 확연히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향하는 목표지점이 구체적이어서 그랬다.

하지만 요즘처럼 건전한 지식인과 건전한 원로가 처신하기 힘든 시절도 없는 것 같다. 반면 사이비 지식인과 사이비 원로가 처신하기 좋은 호시절도 없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도, 독재주의 사회도 아닌 지금 이 사회 구성원이 공통적으로 지향하는 목표 지점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 나라의 국민은 일제식민지와 분단의 역사를 거치면서 일부 권력층이 만들어 놓은 ‘좌우익 통치’의 수단, 놀잇감으로 변질됐다. 

 

이 나라 일부 권력계층이 선전하는 좌우익 개념은 정반합에 의해 조화의 세계를 추구하는 헤겔의 변증법의 범주도 아니고, 사회계급의 높고 낮음,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서로 맞서는 유럽식의 좌우익 개념도 아니다. 

 

왼쪽 날개와 오른쪽 날개의 조화 속에서 우리가 모두 갈망하는 사회로 향해 날개짓을 하는 그런 사회의 개념이 아니란 말이다.

이 나라의 좌우익 개념은 ‘빨갱이 혹은 김정일이나 김정은의 편에 선 자’를 좌익으로 하는 선을 긋고, 죽이느니, 살리느니 하는 식이다. 

 

이러다 보니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앞장서야 할 유럽식의 좌익이 우익에 서 있고, 사회적 신분 체계를 바로잡기 위해 싸워야 할 유럽식의 좌익이 우익에 서 있다. 소위 잡탕이다. 이러니 국민을 바보로 보는 양심 없는 권력층, 사이비 정치인들에겐 이 나라가 유토피아가 아니던가.

이 나라의 좌우익은 일제 식민시대와 분단의 역사를 건너오며 권력 독점층이 만들어놓은 통치수단, 통치무기에 불과하다. 이러니 사회학자 한완상이 ‘민중과 지식인’에서 통탄할 만도 했다.

 

“이 나라 국민이, 마치 짐승의 무리처럼 떼 지어 몰려다니는 군중에서 벗어나 자신의 철학과 가치관을 향해 삶을 실천하는 민중으로 태어나라. 군중으로부터 탈피하지 못하면 당신은 영원히 수구 독점세력의 노예가 된다”

이 이상한 사이비 철학에 휘둘리는 ‘대한민국 특유의 좌우익 사상, 극복의 답’을 중도에서 찾아야 한다. 알량한 고사성어를 섞어가며 자신이 정의 의 화신인 척하는 H단체장 등 정치인으로부터 과연 ‘나의 미래와 행복을 위탁할 수 있겠는가’

 

지역사회에 건전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할 구미지역 일부 전직 지방의원과 원로들이 연일 뱉어내는 ‘좌우익 발언’으로부터 ‘나의 미래와 행복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상대를 죽이느니, 살리느니 하는 ‘조선시대 사색당파식, 분단의 이분법적식’ 구태를 일삼는 일부 여론주도층과 삶을 동행할 수 있겠는가.

 
공존공생은 저들에겐 저주의 넋두리일 뿐이다. 공존공생을 하려면 자신들이 불공정 사회에서 도적질한 물적 자산을 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화가는 그림으로써, 문인은 글로써, 가수는 노래로써, 기자는 취재한 내용을 글로써 올바름을 설파해야 한다. 자신의 위치에서 ‘반드시 줄 것을 주고 반드시 받을 것을 받는’ 정의를 실천해야 한다.

 
좌익과 우익으로 편 가르기를 하기보다 중도를 설파하는 건전한 지식인과 건전한 원로가 많은 사회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자신의 최고라는 소위 지식인, 자신만이 특출한 진보라는, 혹은 특출한 보수라는 알량한 선민의식부터 퇴출해야 한다. 겸손이 기본이다. 칸트의 가르침처럼 ‘인간은 존경의 대상’. 그게 근본이어야 한다.


명상을 통해 껍데기부터 벗겨내야 한다. 깨달음을 위한 고민을 일상으로 삼아야 한다. 그래야 올바른 나의 삶, 내가 아닌 남을 위한 공헌적인 삶을 살 수 있다.

 

이세연 기자 gbp1111@naver.com

사진=경북정치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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