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경북정치신문

기획>공단 조성 50년,땀의 역사 쓴 구미상의 회장들..
기획·연재

기획>공단 조성 50년,땀의 역사 쓴 구미상의 회장들

김경홍 기자 입력 2019/01/08 08:51 수정 2019.01.08 08:51


↑↑ 지난 3일 구미상공회의소에서는 신년인사회가 열렸다
ⓒ 경북정치신문

지난 3일 구미상공회의소 신년인사회에서 인사말을 하는 조정문 회장의 표정은 담담하고 착잡한 기색이 역력했다.
“전체 기업수의 88%를 차지하는 구미지역 50인 미만의 중소기업의 가동률이 31% 수준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부진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중소기업 혁신 생태계 조성을 위해 모두 혼연일체가 돼 더욱 매진해야 합니다.고무적인 일도 없지 않습니다. 올해 KOTRA 구미분소가 설치될 예정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장 밀착형 서비스가 가능해져 수출 중소기업의 해외판로와 마케팅에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이러면서 조회장은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어야 한다는 바램도 강조했다.
“1단지 구조고도화 사업의 성공적 추진과 창업특구 조성을 통해 신규 일자리가 늘어나고 머물고 싶은 구미를 만들어 인구 유입을 늘려야 합니다.
또 5단지가 아직까지 입주업종 제한 및 입주요건 미비로 분양실적이 저조한 만큼 조건을 완화해 분양활성화가 꼭 이뤄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역대 구미상공회의소 회장들은 늘 구미경제의 명암과 희노애락을 함께 해 왔다.흥할 때 조용해 눈시울을 적셨고,쇄할 때 팔을 걷어부쳤다.


내륙최대공단인 구미공단은 박정희 대통령 재임시절인 지난 1973년 총면적이 10.4㎢에 이르는 제1단지가 완공되면서 낙동강의 신화를 쓰기 시작했다. 섬유와 가정용 전자제품 생산에 중점을 둔 시기였다.
이어 2.3㎢의 2단지는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거치면서 1983년 완공됐다. 이 곳에는 주로 반도체 산업과 전자산업이 입주했다. 4.8㎢의 면적에 완공된 제3단지에 첨단산업이 들어선 시기는 1994년 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지난 2006년말 조성이 완료된 제 4단지에는 디지털 산업단지 및 외국인 기업 전용단지, 부품소재 전용단지가 들어섰다.
이어 지난 2009년에는 5단지 조성이 확정되는 또 다른 역사를 쓰고 있고, 조성이 완료된 지역을 대상을 분양을 하고 있다. 하지만 업종 다변화라는 과제가 1년 넘게 풀리지 않으면서 안타까움을 더해주고 있다.

구미공단은 특히 2005년 단일 산업단지 최초로 300억불의 수출을 달성, 전국 수출액의 11%, 무역수지 흑자액의 84%를 차지하면서 세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2018년, 우리나라 전체 수출이 사상최초 6천억불을 돌파하면서 ‘수출 호황’을 누리고 있으나, 한때 전체 수출과 수출 흑자를 견인해 온 구미공단은 263억달러에 그쳤다. 수출액의 54%를 차지하는 전자제품 수출액이 19.7%나 줄어든 것이 주된 원인이었다.

이처럼 구미공단에 ‘수출 경고음’이 울리고 있는 가운데 12월31일 구미상공회의소는 ‘2019년 1/4분기 기업경기 전망 조사 결과’는 2019년 구미공단 경기가 더욱 더 위축될 것임을 예고했다.
특히 2019년도 1/4분기 기업경기 전망은 62로써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저가 될 것으로 우려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조 회장이 여•야•정은 물론 시민과 사회단체가 함께 힘을 도모해 구미경제 재건에 나서야 한다고 호소하고 나선 것이다.

◇구미와 희노애락 함께해 온 구미상의

내륙최대공단인 구미공단은 박정희 대통령 재임시절인 1973년 총면적이 10.4㎢에 이르는 제1단지가 완공되면서 낙동강의 신화를 쓰기 시작했다. 섬유와 가정용 전자제품이 주력이었다.
이어 2.3㎢의 2단지는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거치면서 1983년 완공됐다.이 곳에는 주로 반도체 산업과 전자산업이 입주했다.
4.8㎢의 면적을 기반으로 완공된 제3단지에 첨단산업이 들어선 것은 1992년 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2006년말 조성이 완료된 제4단지에는 디지털 산업단지 및 외국인 기업 전용단지, 부품소재 전용단지가 들어섰다. 이어 2009년 5단지 조성이 확정된 후 현재 조성이 완료된 곳을 대상으로 분양에 나서고 있으나 발묶인 업종 다변화라는 과제는 1년 넘게 미결로 남아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구미공단은 특히 2005년 단일 산업단지 최초로 300억불의 수출을 달성, 전국 수출액의 11%, 무역수지 흑자액의 84%를 차지하면서 세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 2005년부터 수도권 규제 완화 한파가 불어닥치기 시작하면서 구미공단은 홍역을 앓기 시작했고, 결국 2009년부터 거세게 불어닥친 수도권 규제 완화 바람은 대기업 이탈을 가속화시키면서 구미경제를 벼랑끝으로 몰고 갔다.


50년 역사의 구미공단이 신화를 쓰기까지는 별을 벗삼아 출퇴근을 하면서 비지땀을 쏟은 근로자와 기업가의 숨은 노력이 그 밑거름이 되었다. 아울러 김윤환, 박세직 전의원등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빼놓을수 없는 구미출신 정치권의 노력도 주효했다.

특히 구미공단을 존재케 한 주역으로서 구미상공회의소의 노력은 빼놓을 수 없다.뿌리를 내리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구미공단과 함께 희노애락을 함께하면서 급변하는 외풍에 맞서 지혜와 슬기를 발휘한 구미상공회의소의 중심에는 역대 회장단들이 있었던 것이다.

지난 1981년 8월 초대 회장을 배출하기 시작한 구미상공회의소는 2018년 6월 취임한 조정문 13대 회장에 이르기까지 10명의 회장들이 산업전선의 선두에 서서 구미공단을 지키고, 또 발전시키는 역사적인 임무에 충실 했다.
↑↑ 이근배
ⓒ 경북정치신문

▶초대-2,3대 이근배 회장

구미상공회의소 출범과 함께 회장에 취임한 이근배 회장은 1981년 8월부터 1988년 12월까지 초대-2,3대회장을 맡았다. 역대 최장수 회장인 이 회장은 1942년 일본동경 조도전 고등학교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 부사전토 공업주식회사 기술부 근무를 시작으로 산업계에 발을 들여 놓았다.1952년부터 1953년까지 조선 기업주식회사 상무 취재역 공장장을 역임한 이회장은 1965년 신광기업주식회사 전무이사를 역임한 후인 1965년 11월 구미공단 역사의 핵심인 오리온 전기 주식회사 대표이사에 취임했다. 정부는 그의 업적을 평가해 1973년 8월 통탑산업훈장을 수상했다.

이회장이 역임한 81년부터 88년까지의 세월은 역사의 격변기였다. 이회장이 3대, 7년여의 회장직을 마무리한 것은 88년 12월 15일이었고, 그 뒤를 이어 구미출신 재력가였던 문대식회장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제3,4대 문대식회장
1988년 12월15일부터 1993년 8월까지 이근배 회장에 이어 두 번째로 최장수 상공회장을 지낸 문대식회장은 1960년 청구대학 3년을 수료하고 1978년 제2대 통일주체 국민회의 통일대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1981년 민주평통 자문회의 구미시협의회 회장은 지내기도 한 문회장은 상의회장에 앞서 7년동안 부회장을 지낸 상의 역사의 산증인이기도 했다.
1984년(주) 오성상호 신용금고 대표이사에 취임한 문회장은 1991년에는 구미출신으로서는 처음으로 경상북도 체육회 부회장을 맡기도 했다. 정부는 1985년 문회장에게 국민훈장 동백장을 안겨주었다.
이근배, 문대식 회장 이후의 회장들은 김용창 회장을 제외하면 재임을 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1992년에는 제 3단지가 완공되었고, 1993년부터 구미공단은 더욱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취임한 이가 바로 제5대 이기룡 회장이었다.
▶제5대 이기룡 회장
1993년 8월 취임한 이기룡 회장은 1943년 욕지공립중학교를 졸업하고,해방이 되던 1945년 체신사원 양성소 무선통신과(전문과정)를 졸업했다.
전문을 살려 체신부 중앙 접신국을 시작으로 공직에 발을 들여놓은 이회장은 주경야독으로 1949년에는 국립체신대 행정학과를 졸업하기도 했다. 1960년 통신장, 사무장을 지내기도 한 대한 해운공사를 사직한 이 회장은 같은 해 대검찰청 사무국 통신과장 직무대리, 1964년 통신과장을 역임했다,이후 미국기업에서 2년 동안 근무한 이회장은 1966년 7월 동방 성업주식회사 부장, 상무, 전무이사 등을 거쳐 1972년 고려전기 주식회사를 설립했고, 1984년 4월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
경북경영자 협회 회장, 한국 전자 공업진흥회 이사를 역임하기도 했다.이기롱 회장의 뒤를 이은 이가 1996년 8월10일 취임한 제6대 이동춘 회장이었다.
↑↑ 이동춘
ⓒ 경북정치신문

▶제6대 이동춘 회장
1999년 8월9일까지 3년 동안 상의회장을 지낸 이 회장은 경주고등학교에 이어 1957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금속공학과를 졸업한 엘리트 기업인이었다.서울대 졸업 이듬해인 1958년 주식회사 동신양행에 입사한 이 회장은 동진공업사, 동아자전차를 거쳐 1969년 대명화공약품 상사를 경영했고, 1972년에는 대명산업사를 설립했다.
이 회장은 구미상공회의소와 인연이 남다르다. 1988년 구미상의 감사를 시작으로 부회장, 회장을 지냈으니 말이다. 경북경영자 협회 이사와 경북경영자 협회 부회장을 지낸 이회장은 서울대학교 동창회 11,12,13대 이사를 지내기도 했다.
한국합섬하면 박동식 회장, 박 회장하면 한국합섭회장이라고 불릴만큼 우리 기억에 생생한 제7대 박동식회장은 1999년 8월9일 취임했다.
↑↑ 박동식
ⓒ 경북정치신문

▶제7대 박동식회장
1980년 영남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박동식 회장은 1972년 이화견직 공장을 설립하면서 경영인의 길에 들어섰다. 1년 뒤인 1973년 이화섬유 주식회사를 설립한 박회장은 1981년 수출의날 은탑산업 훈장을 받았고, 1985년 2월 (주)이화상사를 건립했다. 한국합섭 주식회사를 설립한 것은 1987년 2월이었다.

설립 1년만인 1988년 11월 수출의날 기념 1천만불 수출의 탑을 수상한 박회장은 1993년 7월 이화섬유 주식회사 설립, 1993년 11월 중국청도 이화섬유 유한 공사를 설립하면서 사세를 국외로 확산시켜 나갔다. 구미상의회장 취임 2개월전인 1999년 6월에는 영남대학교로부터 명예경영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박 회장은 20세기를 끝내고 21세기를 연 기간 동안 구미상의를 이끈 회장으로서 역사적인 가치도 그만큼 많이 부여됐다.
2002년 8월9일에는 제8대 김영도 회장이 박동식회장의 바통을 이어받았다.

↑↑ 김영도
ⓒ 경북정치신문

▶제8대 김영도회장
1954년 대구공업중고 졸업, 1958년 부산수산대학교 제조과를 졸업한 김영도 회장은 졸업하던 해인 1958년 대구 영신전업사를 경영하면서 CEO의 길로 일찌감치 들어섰다.
우리 귀에 익숙한 영도전설(주)를 경영하기 시작한 것은 1972년 1월의 일이었다. 1981년 구미상의 상임의원을 시작으로 구미상의와 인연을 맺은 김회장은 1993년에는 국제라이온스 309-N지구 총재를 역임하기도 했다. 1996년에는 구미상의 부회장을 맡았다.
김회장의 뒤를 이은 이는 바로 제9대 박병웅 회장이었다.
↑↑ 박병웅
ⓒ 경북정치신문


▶제9대 박병웅 회장
1953년 문경고, 1957년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박회장은 1968년 삼주개발(주)상무이사를 역임한 후 1973년 5월 한국전자(주)이사를 역임했다.
1978년 대아산업(주)대표이사, 1986년 대아수지 공업(주) 대표이사, 1990년 한국 에프텐(주)대표이사에 취임하기도 했다.
박회장이 구미상의 회장직을 그만둔 것은 2006년 6월 25일이었고, 이날 제10대 이동수 회장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 이동수
ⓒ 경북정치신문

▶제10대 이동수 회장
제6대 이동춘 회장과 경주고 동문인 이 동수 회장은 1974년 경북대 경상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졸업하던 해인 1974년 (주)럭키에 입사한 이회장은 9년 후인 1983년에는 (주)신흥 부사장을 맡았다, 대표이사에 취임한 것은 2년 후인 1985년 12월이었고, 같은 해 신흥통상(주)대표 이사도 맡았다.
2001년 대구경북 견직물 공업협동 조합 이사, 한국 섬유개발연구원 이사, 2004년 (사)구미중소기업 협의회 회장을 맡기도 한 이회장은 2009년 6월 25일 그 바통을 제11대 김용창 회장에게 넘겼다.
↑↑ 김용창
ⓒ 경북정치신문

▶제11,12대 김용창 회장

"구미 경제의 규모에 맞게 상공의원수를 증원해 기업의 참여도를 확대하고, 2011년 상공회의소 임의 가입에 대비한 자생력을 키울 수 있도록 구미상의 발전기획단을 발족시키겠다"고 신임 포부를 밝힌 김용창 회장은 경운대 의료경영학과를 졸업했으며, 구미시 이업종교류회 회장과 구미상의 6대-10대 상공의원, 10대 부회장을 역임했다.
2009년부터 6월25일부터 현재까지 신창메디칼(주) 회장을 맡고 있다.
2011년 3월 25일 국토해양부와 국회를 방문해 구미철도 CY 존치 및 신설촉구를 위한 1인 피킷 시위를 하기도 했다.
2014년 구미시장 선거에 나섰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김회장의 바통을 이은 이는 류한규 회장이었다.
↑↑ 류한규
ⓒ 경북정치신문

▶제13대 류한규 회장
50명의 상공의원을 대상으로 한 회장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당선된 류한규 회장은 경북고등학교와 대구공업대학을 졸업했다.
예일산업(주)대표이사인 류 회장은 상공의원, 배구협회 회장, 구미라이온스 회장, 구미중소 기업협의회 회장을 맡으면서 지역사회에도 공헌했다는 평을 얻었다.
조용하고 묵직하게 임무를 수행하는 업무스타일이 장점이었던 류 회장은 재임시절 KTX 구미정차, 5공단 업종 다변화를 위해 노력한 업적을 남겼다.

◇역사는 잊지 않을 것

낙동강의 신화에 빛나는 구미공단, 오늘의 공단과 구미경제가 있기까지는 이들 역대회장들의 보이지 않은 비지땀이 밑거름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따라서 구미공단과 구미 역사는 이들 역대회장들을 잊지 않고 영원히 기록할 것이다.

수도권 규제완화와 대기업 이탈로 구미공단은 위축되고 있고, 민심은 불안해 하고 있다. 구미공단은 이제 새로운 성장동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또 다른 과제를 안고 망망대해를 항행하고 있다.
세상과 별리했거나 혹은 경영의 전선에서 아직도 뛰고 있는 역대 회장들,그들은 한결같이 구미공단의 번영을 갈망하고 있다.

저작권자 © 경북정치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0
로그인후 이용가능합니다.
0 / 300
등록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이름 *
비밀번호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복구할 수 없습니다을 통해
삭제하시겠습니까?
비밀번호 *
  • 추천순
  • 최신순
  • 과거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