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만 정권의 소개령 때문에 해변으로 이주하는 제주 산간마을 주민들 |
진상보고서에 따르면 이승만 정권의 만행에 의한 4·3사건의 인명 피해는 2만5천명에서 3만명으로 추정되고, 강경진압 작전으로 중산간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으며, 가옥 3만9천285동이 소각됐다. 4·3사건진상조사위원회에 신고 접수된 희생자 및 유가족에 대한 심사를 마무리한 결과 2011년 1월 26일 현재 희생자는 1만4천32명,희생자에 대한 유족은 3만1천255명이었다.
당시의 만행은 극악무도했다. 수십명, 수백명씩을 학교 운동장에 집결캐 해 총과 돌팔매질로 목숨을 끊었다. 이 때문에 지금도 제주의 각 마을에는 하루에 제사를 지내는 곳이 수십곳에 이를 정도다.
당시 제주의 삶터는 해변가가 아닌 중산간이었다. 역사를 거슬러가면 왜적의 노략질을 피해 산간에 삶터를 형성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제주 4•3사건이 발생하자, 이들의 삶터인 중산간 마을은 ‘공산당과 내통한다’는 터무니없는 이유로 불타 없어졌으며,그곳에 살던 이들은 해변으로 이주해야 했다.
◇왜 4•3 사건이 발생했나
1948년 발생한 제주 4.3사건은 단독선거, 단독 정부 수립 반대, 통일정부 수립촉구 등을 슬로건으로 내건 민족운동이었다. 당시 이승만 정권과 미군정은 제20연대장 브라운 대령을 제주에 파견해 5·10 선거를 추진했다.
5월 10일,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일제히 선거가 실시됐다. 그러나 제주도의 세 개 선거구 가운데 두 개 선거구가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됐다. 제주도가 남한에서 유일하게 5·10 선거를 거부한 지역으로 역사에 남게 됐다. 이에따라 5·10 선거 후 강도 높은 진압작전이 전개됐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이 전면 개방되면서 1947년 3·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3 무장봉기로 촉발되었던 제주 4·3사건은 7년 7개월 만에 비로소 막을 내리게 된다.
1980년대 이후 4·3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각계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2000년 1월에 4·3특별법(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 특별법)이 공포되고, 이에 따라 8월 28일 ‘제주4·3사건진 상규명 및 희생자명예 회복위원회’가 설치돼 정부차원의 진상조사를 실시했다.
이 결과 2003년 10월 정부의 진상보고서(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가 채택되고, 대통령의 공식 사과 등이 이뤄졌으며, 이후 4·3평화공원 등이 조성됐다.
4·3사건으로 제주지역 공동체는 파괴되고 엄청난 물적 피해를 입었으며, 무엇보다 깊은 상처로 남아있는 참혹한 인명피해를 가져왔다. 4·3특별법 공포 이후 4·3사건으로 인한 갈등과 반목의 역사를 청산하고 화해와 상생의 정신으로 21세기를 출발하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며, 제주도는 2005년 1월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됐다.
이승만 정권이 일으킨 민중탄압, 학살에 맞서 제주도민이 항거한 날이었다.
무고한 청년들은 연좌제 때문에 청운의 꿈을 버려야 했다. 지금도 그 아픈은 지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