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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정치신문

‘세상이 무상타!’ 고독한 구미출신 허형식 독립운동가..
사회

‘세상이 무상타!’ 고독한 구미출신 허형식 독립운동가

김경홍 기자 입력 2019/04/07 19:52 수정 2019.04.09 19:52

↑↑ 보훈청에 독립유공자 포상을 신청하고 있는 장기태 서훈 추진위원장
일본과 맞서 싸운 항일 정신 평가해야
서훈 추진하는 민족문제 연구소 구미지회 장기태 서훈추진 위원장

“당대의 여러 가지 모순을 척결하고,억압과 폭력,차별이 없는 사회, 불평등과 탐욕,약자에 대한 수탈없는 사회, 정의롭고 자유로우며 풍요로운 사회, 현재보다 더 나은 미래의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맹렬히 투쟁하다가 끝내 33세의 나이로 만주국 토벌대의 총탄에 장렬하게 산화했다”(동북아 역사재단 장세윤 수석 연구위원의 글 중에서).

독립운동가는 백척간두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건 싸움을 벌였으나, 우리 역사는 그 후손들을 마치 만주벌판에서 둥지를 찾아 해메도는 가난하고 외롭고 고독한 존재로 전락시켰다. 이것이 잘사는 대한민국의 현 주소다.

여기에 더해 조국을 위해 목숨과 맞바꿔 투쟁한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아직도 주변 강대국이 쳐 놓은 이데올로기의 창틀에 갇혀 세상 밖으로 걸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구미시 임오동 출신의 허형식(허연)장군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러나 최근들어 3•1 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8•15 광복절을 앞두고 서훈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움직임이 일고 있다.
그 주인공이 바로 더불어민주당 장기태 전 구미을 위원장이다. 2018년 10월 21일 구미시민과 함께 왕산 허위 순국 110주년 추모제를 지낸 후 ‘만주 제일의 항일 파르티잔 허 형식 장군의 독립 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한데 대해 의문을 가진 장 전 위원장은 2006년 10월 도서출판 고구려에서 허형식 장군에 대한 서훈을 추진했으나, 서훈을 신청할 직계 후손이 없고, 만주지역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재평가가 없었다는 이유로 심사대에서 제외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후 장 전 위원장은 민족문제 연구소 구미지회 창립과 동시에 허형식 장군 서훈추진위원장을 자청했고, 두달여 동안 준비과정을 거쳐 4월2일 신청서를 국가보훈처 대구지방청에 접수했다.

왕산, 장진홍, 박희광, 박상희, 김정술 독립투사가 써 내린 구미독립운동사에 허형식 장군을 새롭게 부각시킨 장기태 민족문제 연구소 구미지회 장기태 서훈 추진위원장은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8•15 광복절에는 꼭 서훈을 받을 수 있도록 힘을 모아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허형식 장군

1909년 11월 18일 구미시 임오동에서 태어나 1942년 8월3일 생을 마감한 허 장군은 1920년 부친 허필을 따라 중국 요녕성 개원현 이가태자로 이주했고, 1929년에는 길림성 하얼빈 부근 빈현 가판찬으로 이주했다. 주된 활동지는 주하현(현 상지현) 이었다.

1942년 8월3일 새벽 일본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다 사망하자, 일본은 시신의 일부분을 경안현 경찰서-삼강성 경무청- 일본관동군으로 옮겼다. 승리를 알리기 위한 치적용으로 시신을 활용한 것이다. 남은 시신 일부분은 헤이롱장성 정한현 철봉령 소롱하계곡 입구에 매장했다고 전해진다. 암울한 역사가 아닐 수 없다.

►허 장군은 1930년 중국 빈현에서 중국 공산당 만주청년 위원회에 입당했다. 이어 그해 5월에는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 습격사건을 주동했고, 1930년 9월부터 1931년 9월까지 심양 감옥에 투옥됐다.

1933년 3월에는 중국 탕원현에서 유격대를 창건했다.반일 회원이 1천400명에 이를 만큼 거대한 조직으로 확장될 만큼 위세가 대단했다.
이러한 여세를 몰아 1934년 6월에는 주하현에서 의희산이라는 가명으로 동북반일 유격대 합동지대 제1대대장을 맡아 만주국 관헌을 격파했고, 1935년 겨울에는 일본군과 만주국군을 대상을 매복 습격해 1백여명을 살상했다. 당시 허 장군은 제3군 3단 단장으로 90명의 대원을 이끌었다.

그해 겨울부터 1936년 중반까지 허 장군은 제3군 제3단에서 제3사로 격상 후 쌍룡대 의용군과 연합해 반일연합군 남지휘부를 건군했으며, 납랍둔, 오도강, 십팔충전자 전투에서 승전했는가 하면 오상현 소산자 전투를 통해 적의 거점을 함락시키기도 했다.

1936년 4월부터 1939년 3월까지 이어진 일본 만주토벌 작전에서는 일본군 3개단, 만주군경 2만5천명 등 5만명의 병력과 맞서 싸웠다.
특히 1936년 11월에는 철력현과 해륜현에서 10회에 걸친 전투 끝에 관동군 500여명을 격퇴했는 하면 무기를 노획했다.

이어 1939년 1월에는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3,4재대와 제1사, 제2사를 지휘했고, 1940년 봄에는 북만주에서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겸 제12지대 정치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항일투쟁을 주도했다.

1940년 봄부터 1941년 봄까지는 또 하얼빈 지역에서 기마부대를 지휘하면서 1년 동안 30여개 현에서 40여차례의 전투를 통해 일본의용대 훈련소 5개, 비행장 1개를 습격했고, 250명 사살과 함께 500여명을 체포했다. 또 기관총 76정, 박격포 4문, 총구류 500점을 노획했다.

1941년 초에는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을 총괄지휘했으며, 1941년 봄부터 1942년 8월까지는 북만주지역에서 휘하부내 소분대를 편성해 분대활동에 나섰으며, 1942년 8월에는 소릉하 계곡에서 노숙 중 새벽에 만주국 토벌대의 포위망 속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전사했다.

특히 1942년 8월1일에는 소련에서 동북항일연군 교도려 3영장(소련군 대위계급)에 임명하고, 소련으로 월경하라는 당위원회의 지시도 거부하고, 만주에 잔류해 항일투쟁 활동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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