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민선7기 구미시장 선거
민선7기 구미시장 선출을 위한 지방선거는 2018년 8일과 9일의 사전투표를 시작으로 카운트 다운에 들어갔다. 불과 1년 전, 당시 선거의 관전포인트는 좀처럼 선거결과를 예측하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불과 4년전 구미시장 선거 당시만해도 특정 보수정당의 공천만 받으면 당선은 떼어놓은 당상이었다. 하지만 2018년 6월 선거는 진보와 부수 후보가 치열하게 각축을 벌이는 긴박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구미시의원 나 선거구(형곡, 송정, 원평, 지산, 광평)와 마 선거구(인동동, 진미동)에서 자유한국당 다번 공천을 받은 후보들이 등록을 포기했는가 하면 3명이 정수인 시의원 바 선거구(양포, 산동, 장천, 해평)에는 애시당초 다번을 공천조차 하지 않았다. 그만큼 정치지형도가 가파르게 바뀌고 있다는 현실을 증빙하고 있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실망감과 구미가 처한 현실에 절망한 상당한 민심이 기득권을 누려 온 보수정치에 대해 심한 피로감을 느끼면서 새로운 대안세력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수의 심장을 자처해 온 구미에 상상조차 못할 민심의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선거일인 6월 13일,상황은 긴박하게 흘러갔다. 투표율이 4년전의 52% 내외일 경우 자유한국당 후보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고, 53%를 넘어설 경우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당선될 수도 있다는 지역정가는 전망하고 있던 터였다.
이날 오후 3시를 넘어서면서 투표소에는 구미사회의 주축을 형성하고 있는 젊은 층의 발걸움이 이어졌다. 결국 최종투표율은 56.2%를 마크하면서 역대 구미지방 선거사상 진기록을 수립하는 이변을 낳았다. 개표결과에 이목을 집중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관측은 빗나가지 않았다.
더불어민주당의 장세용 후보가 7만4883표(40.79%)를 얻어 7만1030(38.69%)표를 얻은 자유한국당 이양호 후보를 따돌리고, 구미 지방선거 사상 처음으로 진보 후보가 시장으로 당선된 것이었다. 5월 말과 6월초 몇몇 여론조사에서 박빙전을 벌일 당시만 해도 여론조사 결과가 당선으로 이어질 것이냐는데 대해서는 시민들 대부분이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결국 구미정치사에는 보수의 심장 구미에 진보시장 탄생이라는, 보수에게는 치욕, 진보에게는 이변의 기록을 남겼다.
▻2018년 구미시장 선거 관전포인트
2018년 구미시장 선거의 관전 포인트는 보수분열과 진보결집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주요 각 당의 후보공천을 위한 경선을 앞둔 시점만 해도 지역 정가는 더불어민주당, 자유한국당, 바른미래당 후보의 3파전 양상을 예상하면서도 자유한국당 후보가 당선될 것이라는데 이의를 달지 않았다.
하지만 자유한국당 경선과정에서의 불협화는 이미 분열된 보수를 더 쪼개는 요인으로 작용했다.당내에서조차 경선방법과 절차에 대한 불만이 쏟아져나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결국 경선에 참여했던 김봉재 전 구미시 새마을회장이 자유한국당 탈당 선언과 함께 무소속 출마로 마음을 굳힌데다 결선 경선 결과에 불복한 허복 전 구미시의회 의장까지 자유한국당을 탈당, 김 후보 진영으로 합세하면서 구미시장 선거판세는 진보진영의 더불어민주당 장세용 후보와 보수진영의 자유한국당 이양호 후보, 바른미래당 유능종 후보, 무소속 김봉재 후보 등이 자웅을 겨루는 사실상 4파전 양상으로 귀결됐다.
결국 보수정치가 구미경제를 도탄에 빠뜨리게 했다는 시민적 실망감과 보수후보의 분열양상등
의 원군을 등에 없는 더불어민주당 장세용 후보는 당선의 영예를 안았다.
▻장세용 시장 취임 후 1년
2015년을 전후해 구미공단에는 경제한파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수출은 곤두박질치기 시작했
다. 공단에서 불어오는 한파는 지역경제에 직격탄이었다. 자영업자들은 임대세조차 낼
수 없는 생존의 벼랑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경제적 상황이 악화하면서 도탄에 빠진 구미경제의 원인제공자로 보수 정치권을 겨냥한 시민
들은 경제 활력의 출구의 해답을 더불어민주당으로부터 찾으려고 했다.
어려운 경제 상황 속에서 보수와 진보를 망라하는 시민들이 ‘흰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실용주의 노선을 택한 것이다.
이러한 시민의 갈망에 의해 탄생한 장세용 시장이 취임1주년을 맞았다. 장시장 스스로가 시민
의 행복과 구미발전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를 깊이 돌아보아야 할 시점이다.
또 진보와 보수를 모두 아우르는 범시민의 시장으로서의 의지와 각오를 가다듬고 신발끈을 조
여매 주기를 생존과 생계의 벼랑 끝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은 갈망하고 있다는 점도 다시 한번
각인해야 할 시점이다.
◆1995년- 2014년 구미시장 선거
▻박미진 시장은 마지막 관선 시장, 2개월 최단 임기
1993년 취임한 김영삼 대통령은 행정의 효율화를 주창하면서 도농통합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웠다. 여파가 만만치 않았다. 선산지역 도의원은 통합 반대에 사활을 걸고 삭발에 들어갔고, 일부 선산지역 주민들은 역사의 중심인 선산군의 구미시 종속은 용납될 수 없다면서 거세게 반발했지만, 정치적•시대적 기류는 선산군의 구미시 통합으로 이미 기울고 있었다.
통합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던 시절인 1994년 1월1일부터 1995년 4월 19일까지 관선 시대의 길을 걸어야 했던 이가 박병련 시장이었다. 혹한이 몰아쳐도 주머니에 손을 넣는 일을 절대 금기사항으로 여길 만큼 자기 관리에 엄격하기로 유명했던 박시장은 부하 공무원들에게도 동일한 잣대를 들이댔다.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는 구미시청 역사의 잔잔한 일화로 잊혀지지 않고 있다.
뒤를 이은 이가 바로 박미진 시장이었다. 민선시장 선거 열기가 한여름처럼 후끈 달아오르던 1995년 4월 20일부터 선거가 종료되던 1995년 6월 30일까지의 2개월 동안 시장직을 수행한 박시장은 새로운 시정방침을 정하지도 않았다. 임기 2개월의 박시장에게는 사실상 민선 시장 선거 업무를 무리없이 완수해야 한다는 책무가 주어져 있었다.
▻김관용 민선 초대시장 취임
구미면이 읍으로, 읍이 구미시로, 구미시가 통합 구미시로서 역사적인 기록을 남기기까지 관선 시장을 거친 이는 14명이었다. 그 마지막 바톤을 이어받은 이가 바로 지금의 경북도지사인 김관용 민선시장이었다.
하지만 민선시장이 되기까지는 능선을 넘고 또 넘는 고행의 순간순간을 걸어야 했다. 고아읍 출신으로서 용산세무서장을 끝으로 새누리당의 전신인 민주자유당 공천장을 받고 낙향한 당시 김관용 후보는 평생을 구미에서 터전을 일구며 살아온 전병억 당시 자유민주연합 전병억 후보와 일전불사의 투지를 불살라야만 했다.
김윤환, 박세직 국회의원이라는 든든한 후원군이 버티고 있었지만 선거전은 한치 앞을 내다볼수 없을 만큼의 안개 정국이었다. 사실상 일대일 구도였지만, 뒤늦게 뛰어든 무소속 강구휘, 장경환 후보의 파괴력도 만만치 않았다. 당선권에서 이들 후보가 멀어지기는 했지만 을구가 텃밭인 김관용 후보는 같은 을구 출신인 장경환 후보의 선전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 밖에 없었다.
역으로 갑구가 텃밭인 전병억 후보는 같은 갑구 출신의 강구휘 후보의 선전에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했다. 마치 미분법을 풀 듯 얽히고 설킨 복잡다단한 상황을 거쳐 결국 당선의 영예는 김관용 후보에게 안겼다.
개표결과 김관용 후보는 4만 6130표로 4만 4469표를 얻은 전병억 후보를 1천 661표 차로 누르고 당선됐던 것이다. 개표가 진행되던 1995년 6월 27일 늦은 밤에는 희비가 엇갈렸다. 갑구지역 개표가 진행되던 올림픽 기념관에서는 전병억후보 지지자들이 환호성을 울렸다. 개표결과 3만 5296표를 얻은 전병억 후보가 3만 2539표를 얻은 김관용 후보를 2천 757표차로 눌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을구에서는 상황이 역전됐다. 1만 3591표를 얻은 김관용후보가 9천 173표를 얻은 전병억 후보를 4천 418표차로 따돌렸기 때문이었다. 결국 갑, 을구 합계결과 김 관용 후보는 1천 661표차로 신승을 거두었다.
이외에도 갑구 출신의 무소속 강구휘 후보는 15.08%인 1만9805표였고, 을구 출신의 무소속 장경환 후보는 11.73%인 1만 5404표, 무소속 강상수 후보 2천 891표, 무소속 경광수 후보는 2천 584표였다.
▻무적의 재선, 단독출마한 김관용 후보
초선 임기는 3년이었다.
제2대 구미시장 선거가 1998년 6월4일로 다가오면서 1천6백여차로 분루를 삼킨 전병억 후보의 재도전 의지는 가열되기 시작했다. 1995년 선거의 후유증을 다스리기 위해 붓글씨로 3년의 세월을 억눌러 지냈던 그였지만,3년의 세월이 흐른 구미시의 정세는 상전벽해돼 있었다.
결국 주변의 간곡한 만류에 힘입어 전병억 회장은 재선 도전 의지를 가슴 깊이 들여놓아야 했고, 선거전은 김관용 후보의 단독 출마로 매듭됐다.
▻이강웅 후보와 2파전, 3선 고지 오른 김관용 후보
단독출마로 재선의 벽을 쉽게 무너뜨린 김관용 후보에게 세 번째 선거는 두 번째의 단독 출마를 허용하지 않았다. 한나라당 후보 경선부터 김관용 후보는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감사원 사무관 출신의 이규건 후보가 경선도전장을 냈기 때문이었다. 경선초반부터 과연 김관용 후보가 몇 %로 차로 이기느냐는 식의 결론이 예고된 경선이었지만, 40대 초반이라는 패기와 참신함을 앞세운 이규건 후보의 도전장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박정희 체육관에서 경선결과가 발표되자마자, 체육회 사무실로 달려온 김관용 후보가 ‘몇 %로 차로 이겼는지“를 계산 하는 등 과민반응을 보였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김후보가 이처럼 예민 반응을 보였던 것은 본선전에 박근혜 전 대통령의 이끌던 한국 미래연합 이강웅 후보가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결국 본선에 오른 한나라당 김관용 후보는 고시동기이면서 친구지간으로 포항 부시장을 지낸 한국미래연합 이강웅 후보, 민노당 황준영 후보등과 3파전의 길을 가야만 했다.
2002년 6월 13일,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김관용 후보는 66.4%인 6만 6059표를 얻은 가운데 2만 1691표로 21.8%를 얻는데 그친 이 강웅 후보를 여유있게 물리치며 3선 고지에 안착했다. 민노당 황준영 후보는 11.79%인 1만1736표였다.
▻치열했던 4대 민선시장 선거전
제4대 구미시장 선거전이 있던 2006년의 구미정가는 급변기였다. 2005년 10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가 수도권 규제완화 방침을 천명하고 나선 것이었다. 엘지 기업의 파주 이전설 등으로 곤욕을 치루던 김관용 시장은 좌불안석이었다. 수도권 규제완화는 구미에 치명타로 다가올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챦아도 경상북도 도지사를 겨냥하고 있던 김 시장으로선 한나라당 후보 경선에서 정장식 포항시장, 김광원 국회의원이라는 거물의 벽을 넘어야 할 판국이었다.
김관용 당시 시장의 지혜는 남달랐다. 2005년 11월 7일, 시장은 정부와 여당의 수도권 규제 완화 조치에 반발한 구미시민과 도민들을 공단운동장에 집결, 대규모 궐기 대회를 개최하는 대단함을 보인 것이었다. 하지만 갈 길은 편치가 않았다.
이처럼 수도권 규제완화 방침 발표로 구미정국이 요동을 치던 2006년 5월 31일의 제4대 구미시장 선거는 과열전으로 치달았다.
남유진 국가청렴위원회 홍보협력국장, 윤영길 구미시의회 의장, 김진태 변호사, 김석호 전 경북도의회 의원, 채동익 구미시 경제통상국장등 5파전으로 전개된 한나라당 후보 경선전은 뜨겁기 그지 없었다.
결국 경선 본선에서 남유진 현 시장은 김석호 전 도의원, 김진태 변호사, 윤영길 의장을 누르고 한나라당 후보에 지명됐다. 후보별 자성론도 적지 않았다. 구미시 역사상 최장수 의장을 지내면서 탄탄한 입지를 다지던 윤영길 의장은 뒤늦게 경선전에 뛰어들면서 기대이상의 결과물을 도출시키지 못한데 대해 내내 아쉬워 했다. 김성조 당시 국회의원과 김석호 전 도의원은 오랜 기간 동안 다져온 우정에 금을 새기기도 했다.
본선 결과는 남유진 후보에게 압도적인 승리를 안겨주었다. 매일 아침마다 박정희 대통령 생가를 참배할 정도로 박정희 정신을 추앙하던 한나라당 남 후보는 75.89%인 9만8758표를 획득했다. 반면 무소속 채동익 후보 1만5391표로 11.82%, 민노당 최근성 후보 1만 3265표로 10.19%, 무소속 신수식 후보 2천 719표 등이었다.
▻무경선 한나라당 남유진 후보, 김석호 후보 선전
2010년 6월 27일 실시된 제5대 구미시장 선거에서 남유진 시장은 경선없이 지명을 통해 한나라당 후보의 명찰을 달았다.
하지만 쉽게 한나라당의 명패를 얻었지만 남 후보는 갈수록 거세게 추격해 오는 친박연합 김석호 후보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이명박 정부시절, 친이계에 냉정했던 구미의 친박 민심이 선거를 앞두고 급하게 창당한 친박연합에 이유 없는 사랑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친박 정서가 군중 심리를 보이던 시기였다.
그러나 투표결과 승기는 남유진 후보에게 돌아갔다.
개표결과 남유진 후보는 53.09%인 7만 1719표, 친박연합 김석호 후보는 33.51%인 4만 5263표, 무소속 구민회 후보는 13.39%인 1만 8091표였다.
▻예상을 뒤엎은 50%대 당선, 남유진 시장의 입지 강화
3선을 겨냥한 남유진 시장은 새누리당 경선 당시부터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초선 당시부터 줄기차게 도전장을 내 온 채동익 전 구미시 경제통상국장과 재선 당시 출마를 결심했다가 뜻을 접은 이재웅 전 경상북도 지사 비서실장에 이어 김용창 구미상의 회장이 출사표를 냈기 때문이었다.
경선 시기와 방법도 논쟁거리였다. 여기에다 세월호 참사까지 겹치면서 당초 경선일정이 연기되었는가 하면 여론조사와 대의원 선거 방식으로부터 여론조사 방식으로 경선 방식이 뒤바뀐 경선전은 혼란의 극치였다. 이 과정에서 확인되지 않는 설이 급속하게 확산되면서 정치권은 반목과 갈등으로 빠져들었다.
이 과정에서 이재웅 후보에 이어 채동욱 후보가 경선에 불참키로 하면서 경선전은 남유진 시장과 김용창 상의회장등 2파전 양상으로 모양새가 잡혔다.
하지만 김용창 후보가 8년 시장 관록의 남유진 후보의 벽을 뛰어넘는 다는 것은 한계였다. 여론조사에 의한 경선 결과 남유진 후보는 45.3%였으며, 김용창 후보는 27.3%였다.
이어진 본선에서도 곳곳에 암초가 도사리면서 선거전이 긴박하게 돌아갔다. 그 중심에 서 있었던 게 이재웅 후보와 김석호 후보의 단일화 논의였다. 하지만 새정치 민주연합이 후보를 내고, 단일화 논의가 불발되면서 남 시장의 당선은 예고된 결과로 굳어졌다.
선거 결과 남유진 시장은 40%대 후반에 머물 것이라는 당초 예상을 뒤엎고 전체 투표수 16만 250명 중 과반을 웃도는 52.59%인 8만 2905표를 얻었다.
반면 이재웅 후보 17.45%인 2만 7250표, 김석호 후보 15.91%(2만 5904표), 구민회 후보는 14.01%(2만 2111표)를 얻는데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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