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발행인 김경홍] 내 유년을 기른 곳은 감귤나무가 숲을 이룬 해안가 마을이었다. 저 멀리 수평선이 내려다 보이는 그곳에서 해안가 마을의 동심들은 수평선 너머 세상을 그리워하며 꿈을 키우곤 했다.
목선 몇 척이 가늘게 떠으로다 사라지곤 했던 수평선 너머에는 어떤 세상이 있을까. 간절한 그리움이 어린 동심을 길러낸 그 해안가 마을에는 일밖에 모르는 초로의 농부가 있었다. 세상의 모든 고통을 짊어진 것 같은 그는 말이 없었고, 과수원을 향해 걷는 그는 늘 취기로 휘청거렸다.
술기운이 아니고는 4.3 사건이 가져온 비극적 고통을 이겨낼 수 없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을 때 그는 이미 세상이 존재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 지켜보아 온 초로의 농부는 그러나 가지치기를 잘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다른 농장의 귤나무들은 해갈이와 해풍으로 농사를 망치기 일쑤였지만 초로의 농부가 가꾸는 귤 농장은 매년 풍작이었다.
그 답은 그만의 가지치기와 접붙이기 기술에 있었다.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는 겨울부터 초봄까지 귤나무밭에 살다시피 했던 그 농부는 가지 하나를 쳐 낼 때마다 케케묵은 책자를 들여다보며 오랜 고심을 하곤 했다. 접붙이기도 마찬가지였다. 늘 취기로 휘청거리곤 했지만 가지치기와 접붙이기를 하는 그 순간에는 섬광이 일 만큼 눈에 생기가 돌았다.
↑↑ 미래통합당 황교안 대표(왼쪽)와 김종인 총괄선대위원장. 사진 = 미래통합당 캡처 |
제21대 총선 결과는 더불어민주당의 압승이었고, 미래통합당은 당의 존립 자체를 우려해야 할 만큼 참패였다.
코로나 19로 사태로 정권 심판론에 대한 국민적 관심 희석이 미래통합당이 참패한 주요 원인이라는 시각도 없지 않지만,속내를 들여다보면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일부 후보의 막말 논란 역시 참패의 주된 원인으로 꼽는 시각도 있지만 그 또한 그렇지가 않다. 참패의 원인을 ‘내 탓이오’가 아닌 ‘네(남)의 탓이오’로 돌리려는 책임 회피성 시각이라고 보는 분석이 맞을 듯싶다.
압승을 거둔 더불어민주당 일부 후보들 역시 여성 비하 발언 등 막말 논란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시때때로 뒤바뀌는 공천 원칙이 부재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공천권을 위임받은 공관위원장 등 공관위원들이 권한을 전횡했기 때문이다. 그 모든 책임은 미래통합당 황교안 전 대표에게 있다.
과수나무의 가지를 치기 위해 일꾼을 구했는데 일꾼이 주인의 말보다는 자신의 시각대로 가지를 쳐냈으니, 풍성한 과일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과대 망상이 아닐 수 없었다.
햇빛을 가린다고 가치를 치고, 바람길을 막는다고 가지를 치고, 병세가 있다고 가지를 치다보니 열매를 맺어야 할 과수나무가 온전할 리가 없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들이대며 무수히 쳐낸 과수나무에 접붙이기를 했지만, 뿌리를 내릴 여력이 없는 품종들 일색이었다.
20대 총선에서 진박 공천 논란으로 패배한 미래통합당은 4년 전을 반면교사 삼지 못함으로써 21대 총선에서는 결국 참패했고, 이제 당의 존립 자체를 우려해야 상황에 직면해 있다.
혁신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머지않아 풍성한 과일을 기대할 수 있는 가지를 무더기 쳐내기만 했으니 예고된 결과였다. 병세가 있는 가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치료를 통해 풍성한 과일을 맺도록 했어야 옳았다.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귤나무에 사과나무를 접붙이려고 야단을 떨었으니, 귤 나무가 온전할 리 있었겠는가.
일꾼을 데려다 쓰면서 일꾼 마음대로 가지를 치게 했으니, 주인으로서의 위상은 오간 데가 없었다.
온전한 가지가 많아야 귤나무에 풍성한 귤이 맺히는 법이다. 선거가 임박한 시점까지도 병 기운이 있다는 이유를 들어 가지를 쳐 대기만 했으니, 풍성한 수확을 기대할 수 있었겠느냐는 말이다.
원칙도 공정성도 객관성도 없는 가지치기와 접붙이기가 결국 온전한 귤나무를 고사하게 만든 것이다. 주된 책임은 황교안 전 대표에게 있고, 일을 위임받았지만, 전횡을 일삼은 김형오 전 공관위원장에게 있다.
특히 공천권 행사와 관련한 논란이 일자, 사직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의 행위는 주어진 일도 마무리하지 않고 일터를 빠져나오는 일꾼의 행위와 흡사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참패한 미래 통합당을 들여다볼 때마다 취기의 힘으로, 4.3이라는 비극적 고통을 이겨내기 위한 비정상적인 삶 속에서도 섬광처럼 빛나는 눈빛으로 가지를 쳐낸 그 초로의 농부를 추억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황교안 전 대표는 숙련공이 아닌 견습생이었다. 그 견습생에게 과수나무의 가지치기를 맡긴 보수정치가 생사의 기로에 설 수 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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