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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정치신문

구미 망쳐놓은 리더들, 재평가 받아야..
기획·연재

구미 망쳐놓은 리더들, 재평가 받아야

김경홍 기자 입력 2018/11/20 08:05 수정 2018.11.22 08:05
구미 정치를 되돌아 본다/ 상편

ⓒ 경북정치신문

<기획/ 구미정치사>
정치는 생물이다.꽃대를 풀어올린 새벽녘의 봉선화가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 듯, 영영 만날 수 없을 것 같던 그것들을 봄날에 다시 만나 듯.정치의 현장은 늘 변화무쌍하다.그래서 혹자는 살아남도 순간이요, 스러짐도 순간인 것이 정치세계라고 했던가.
1948년 5월10일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선거부터 2016년 4월 총선이 있기까지 변화무쌍의 66년 구미정치사에 이름을 올린 구미의 국회의원은 15명이다.
이들 국회의원을 배출한 구미정치 66년 동안 격변기의 국회의원들은 긍정의 역사를 썼고, 평온기의 국회의원들은 민심의 이랑에 슬픔과 아픔의 씨를 파종했다.

오랜 세월 동안 보수정치의 심장으로 불려져 온 구미정치사의 출발은 진보였다. 항일독립운동사에 한획을 그은 구미(선산)의 정서가 애시당초 진보성향이었다는 점을 반증해 보이고 사례다. 이러한 진보 민심은 장군 박정희에서 대통령 박정희로 직명을 바꾼 1960년 말로 접어들면서 기세가 꺾였다. 그 시절부터 보수 정서가 구미민심 속에서 외연을 확장해 나갔고, 그로부터 2018년 6월까지 60여년 동안 영토확장을 지속하면서 결국 구미를 보수정치의 심장으로 자리매김케 했다.

긍정보다는 부정의 역사를 쓴 시기이기도 했다. 보수정서의 온실 속에서 태생한 정치인들은 민심보다 당심, 민심보다 권력에 안주했다. 그때마다 민심에 비수가 꽂혔다.
구미의 민심이 각성을 한 것은 2018년 지방선거를 통해서였다. 구미시민들은 진보성향의 더불어민주당 소속의 시장과 23명 정원의 시의원 중 9명, 6명 정원의 도의원 중 3명에게 당선증을 안겼다.
하지만 2018년 7월1일, 진보정치에 당선증을 안긴 구미민심이 최근들어 변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보수와의 건전한 경쟁을 통해 구미발전을 견인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실망감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건전한 경쟁을 기대했던 그 자리에 소모적 정쟁이 꽈리를 틀고 앉았고, 일부 지방의원들의 경우 배격되어야 할 권위주의를 앞세워 집행부 공무원들에게 상처를 안기고 있다. 곳곳에서 민심 이반현상이 포착되고 있는 현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처럼 그릇된 현상이 확장성을 더할 경우 2020년 총선을 기대할 수 없다는 지적은 귀담아 들어야 할 포인트이다. 경제한파가 몰아치는 위급한 상황과 맞딱뜨린 구미민심이 진보 성향의 더불어민주당에게 힘을 실어 준 절대적 이유는 구미경제 회생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구미정치사, 출발은 진보였다
제1대( 1948년 5월 31일- 1950년 5월 30일/ 선거구, 선산군 일원) 총선에서 대한독립 촉성 국민위원회 소속으로 출마해 45.5%를 얻어 당선되면서 제1호 구미 정치인이라는 기록을 남긴 육홍균 국회의원은 제2대(1950년 5월 31일- 1954년 5월 30일 선산군 일원) 총선에서도 22.7%를 획득하면서 재선의원이 됐다.
옥성면 출신의 육의원은 1900년 10월 1일 선산 옥성에서 육병형(陸炳亨)과 예천 임씨의 독자로 태어났다.수원 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 대학 문과에 입학했다.
1922년 무정부주의를 표방한 비밀결사 흑우회에 가입해 회지 〈흑우(黑友)와 소작농〉의 발간을 주도했다. 1923년에는 박열, 김중한 등과 함께 불령사를 조직했다가 그 혐의로 체포돼 투옥되기도 했다. 출옥 후 1926년 10월에 흑우회가 흑색청년연맹으로 이름을 바꾼 뒤에도 항일운동에 참여했다.
1927년 고향으로 돌아와 협동조합 ‘우리 살림사’를 조직하고, 이어 옥성농우회(玉城農友會)를 통해 지역 농민운동을 이끌었다. 1939년 4월 검거돼 다시 1년 3개월간 투옥됐다가 출옥 후 중국으로 떠났다가 해방을 맞으면서 귀국했다. 이후 그는 대한독립촉성국민위원회 선산군지부장에 취임했으며, 1983년 7월 5일에 향년 84세로 별세했다.
제3대( 954년 5월 31일- 1958년 5월 30일, 선산군 일원) 총선에서는 선산학원 재단 이사장 출신의 김우동 국회의원이 탄생했다. 무소속이었던 그는 38.5%를 획득하면서 당선됐다.
하지만 제4대 (1959년 1월3일- 1960년 7월 28일, 선산군) 총선에서는 이승만 정권의 하수인 역할을 한 자유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그러나 41%를 획득하면서 당선의 영광을 안았지만 당선 무효되면서 정치 세계를 떠나야 했다. 자업자득이었다. 이어 1959년 1월 3일 실시된 재선거에서는 무소속인 김동석 의원이 탄생했다.
항일운동을 한 것으로 알려진 김동석 의원의 아들은 바로 김윤환, 김태환 의원이었다. 이들은 보수정치의 핵심인물이었다. 정치세계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어 제5대 ( 1960년 7월 29일- 1961년 5월 16일, 선산군 일원 ) 총선에서는 무소속의 신준원 후보가 39.1%를 획득하면서 당선됐지만 5.16 군사쿠데타로 국회가 해산되면서 10개월 최단명으로 국회의원직을 유지해야 했다.
이 무렵으로 접어들면서 진보성향의 구미정치가 보수성향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 시작을 알린 정치인은 ▶제6대 ( 1963년 12월 17일- 1967년 6월 30일, 군위군▪·선산군 일원) 총선에서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출마해 58.2%를 획득하면서 당선된 김봉환 국회의원이었다. 그는 제7대( 1967년 7월 1일- 1971년 6월 30일, 군위군·▪선산군 일원)와 제8대 (1971년 7월 1일- 1972년 10월 17일, 군위군·▪선산군 일원) 총선에서 내리 당선되면서 3선의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 뒤를 이은 이가 제10대(1979년 3월 12일- 1979년 12월 12일, 구미시·군위군·성주군·선산군·칠곡군 일원) 총선에서 유정회 소속 비례대표로 출마해 당선된 김윤환 의원이었다.
이처럼 김봉환과 김윤환으로 이어지면서 구미정치는 보수정치 속으로 깊게 빠져들었다.
제11대 총선( 1981년 4월 11일- 1985년 4월 10일, 구미시·군위군·선산군·칠곡군 일원) 총선에서는 민주정의당 박재홍, 전국구 김윤환 의원이 탄생됐으며, 12대 ( 1985년 4월 11일~ 1988년 5월 29일, 구미시·군위군·선산군·칠곡군 일원)총선에서는 민주정의당 박재홍의원이 탄생했다.
이어 제13대 ( 1988년 5월 30일- 1992년 5월 29일, 구미시 일원 ) 총선에서는 민주정의당 소속의 박재홍, 김윤환 국희의원이 탄생했다.
이어진 14대(1992년 5월 30일- 1996년 5월 29일, 구미시 일원 ) 총선에서는 민자당 소속의 김윤환, 박세직 의원과 비례대표로 박재홍 의원이 탄생했다.
그 뒤를 이었거나 잇고 있는 정치인이 한나라당 김성조, 새누리당 심학봉, 자유한국당 백승주, 장석춘 의원이다.
1963년 12월 총선에서 민주공화당 간판을 앞세우고 출마해 당선된 김봉환 이후, 그 바통을 김윤환, 박세직, 박재홍, 김성조 의원이 물려받으면서 구미정치는 보수의 깊이를 더해 갔다. 세상이 구미를 보수정치의 심장이라고 할 정도였으니, 그 깊이가 어느정도인지를 가늠할만 했다.
구미 민심이 사실상 진보성향의 더불어민주당에게 힘을 실어준 2018년 6월 지방선거에 이르기까지 보수정치의 세월은 50여년이었다.
이제, 구미는 2020년 4월의 20대 총선을 17개월 남겨놓고 있다. 과연 총선을 통해 구미는 보수정치사를 이어서 쓸 것인가. 아니면 항일독립투사 육봉균 국회의원이 구미현대 정치를 처음으로 쓴 1940년대로 돌아갈 것인가.
그 임무가 더불어민주당 출신의 시장과 지방의원의 역할에 달려있다. 민심의 소재를 얼마나 바르게 파악하고 얼마나 시의적절하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구미정치사의 내용도 달라질 것이다.

△일부 보수정치인, 그래도 격변기에는 제 역할 했다
50여년 동안 맥을 이어 온 구미보수 정치는 때때로 역사에 기록을 남기기도 했으며, 한때는 상처를 안기기도 했다.위기 상황을 맞은 시민들이 길거리로 나설 정도였으니 말이다.
90년대 이후부터 지금까지 시민들은 엘지의 파주이전과 외환 위기, 박대통령 기념관 유치, 수도권 공장 규제 완화, 취수원 이전 등 각종 현안이 발생할 때마다 네 번에 걸쳐 범시민 대책위를 구성하면서 힘을 도모했다.
IMF가 발생할 당시인 1997년에는 범시민이 참여하는 구미경제살리기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했으며, 박대통령 기념관 유치를 놓고 서울 상암동과 구미가 신경전을 벌일 당시인 1999년에는 박대통령 기념관 범시민 구미유치 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로부터 6년 후인 2005년 당시 참여정부의 수도권 공장 신증설 규제완화 방침 발표와 함께 구미와 비수도권 지역의 동요가 확산되면서 구미는 급기야 211개 단체가 참여하는 수도권 규제완화 반대를 위한 범시민대책위를 구성했다.김관용 전 시장이 정치력을 발휘한 역사적 순간이었다.
이어 2010년에는 네 번째로 대구취수원 구미이전 반대 범시민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대구취수장 이전 관련 범시민 대책위를 제외한 3개의 범시민 대책위 활동 결과 1997년의 구미경제살리기 범시민 대책위는 불가능했던 4공단 유치라는 결실을 도출시켰다. 이후 1999년에 결성된 박대통령 기념관 범시민 구미유치위원회는 서울 상암동으로 박대통령 기념관을 뺏겼으나, 세상에 경각심으로 불러일으켰으며, 2005년의 수도권 규제완화 반대를 위한 범시민 대책위는 정부로부터 수도권 규제완화 방침을 유보하는 결과를 도출시켰다.
시민들이 이처럼 길거리로 나섰지만 몰아쳐오는 위기를 자초한 것은 정치권이었다. 이 당시 영남물류센터는 칠곡, KTX와 혁신도시, 전국체전은 김천에 뺏겨야 했다. 더군다나 막대한 채무를 안고 출범한 출범한 원예공단은 매년 수십억원의 시민혈세를 쏟아부어야 했고, 결국 의회가 나서서 공단의 문을 닫아걸었다.
김관용 시장, 김성조 국회의원 시절이었다.
반면 구미를 둘러싼 제반 상황이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는 가운데도 일부 정치인들의 역할이 주목을 받기도 했다.
△박세직 의원
1998년 구미 정치는 혼돈이었다, 박세직 전의원의 자민련 입당에 이어 그해 6월 11일에는 박재홍 전의원이 국민회의에 입당했다. 신한국당에 전폭적인 애정을 보내던 당시 구미민심은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출렁거리는 민심의 물항아리 밖으로 박 전의원을 비판하는 물줄기가 뿜어져 나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연정을 통해 집권할 당시, 박세직 전의원이 신한국당을 탈당하고,자민련에 입당한 배경의 핵심에는 피폐화된 구미공단 경제가 자리잡고 있었다.
OB 맥주 공장이 광주로 이전되는 것을 시작으로 공동화의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한 것이다. 1996년 9월 30일 3공단 조성을 끝으로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던 당시 구미시민들의 절절한 소원은 4공단 조성이었다, 그러나 기존 공단이 공동화되는 상황에서 4공단 착공은 엄두지 내지 못할 지경이었다. 특히 4공단 조성계획은 잡혀 있었으나, 수자원 공사는 정부차원의 획기적인 재정지원이 없으면, 수자원 공사의 자력으로 4공단 조성은 엄두조차 낼수 없다고 공언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처럼 구미공단 상황이 악화일로로 치달으면서 결국 구미는 구미경제 살리기 비상대책위를 구성, 가동시키기에 이르렀다.
이 위기를 극복한 중심에 박세직 전의원이 있었다. 자민련 부총재이었던 박 전의원은 당시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 김대중 대통령의 핫라인을 4공단 착공에 시의 적절하게 활용했다.
자민련에 입당, 4공단 조성에 정치의 명운을 걸다시피 했던 박의원은 대구에 내려와 있던 김대중 대통령을 구미4공단 착공식에 참석시키는 정치력과 기지를 발휘할 만큼 영향력을 발휘했다.
4공단 착공식 당일 김대중 대통령은 대구 행사를 마치고 귀경할 예정이었다.그러나 박 세직 전의원은 대통령 비서진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김종필 총재라는 핫라인을 활용, 예정에 없던 대통령의 4공단 착공식 참석이라는 역사를 쓰게 한 것이다.
구미에 대한 깊은 애착이 없이는 기대할 수 없는 역사적 순간순간들이었다.
돌아온 결과는 박 전의원에게 혹독했다. 4공단 착공을 통해 구미에는 경제 부흥의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지만, 박 전의원은 2년 후인 2000년 실시된 16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신한국당에 열렬한 사랑을 보내던 야박한 지역민심이 그를 총선에서 내려앉게 했던 것이다.
하지만 훗날 세상이 살신성인의 삶을 평가했으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박세직이라는 정치의 꽃’이 지고 난 자리에 4공단이라는 구미공단부흥이라는 열매가 맺혔으니 말이다.

△심학봉 국회의원
2012년 4월 실시된 총선을 통해 등원에 성공한 심학봉 의원은 포항출신의 비토박이었다. 그만큼 국회의원 뱃지를 달기까지는 험란한 길을 걸어야 했다. 당선 이후에도 장애물은 제거되지 않았다.호사다마였다. 지역민들과 함께 손을 맞잡고 어렵고 힘든 터널을 빠져나오려던 간절한 소망과 패기 앞에 선거법 위반이라는 장애물이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2014년 1월, 무죄판결을 받기까지 심의원은 20여개월 동안 질곡과도 같은 고개를 넘나들며 선거법과 싸워야 했다.
그러나 심의원은 고독한 십년창하 (十年窓下)의 세월 동안 노후 산업단지 구조첨단화 특별법안, 에너지이용 합리화법 일부 개정법률안과 산업집적활성화 및 공장설립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해 가결시키는 등 의정에 전념했다.구미1공단을 살리기 위한 전략이었다.
특히 심의원은 기로에 선 구미1공단에 신성장 동력을 수혈해야 침체 일로로 치닫는 공단 경제를 살릴 수 있다는 역사적인 과제를 풀기 위해 열정을 쏟아부었다.
십여년 째 무허가 시설로써 구미발전의 저해요인으로 작용해 온 구미복합 역사와 1991년 지하5층, 지상 13층 규모로 착공했으나 지하5층, 지상2층 바닥까지 콘크리트 타설과 지상7층까지 철공빔을 시공한 상태에서 부도로 중단되면서 20여년 동안 흉물로 방치된 산업단지 입구의 삼진센츄리 타워를 해결한 것도 그였다.
두 가지의 대형과제 해결과 함께 심의원은 ‘구미를 한국의 실리콘 벨리’로 태어나기 위한 구미1공단 재창조를 늘 의정활동의 핵심에 두었다.
이결과 백지화 상태로 출발한 구미1공단이 서서히 그 새로운 모습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혁신단지 지정과 함께 대표발의한 노후산업단지 특별법이 의결되면서 구미1공단 재창조를 위한 법과 제도를 완비한 것이다. 이에따라 산업 통상자원부의 구조고도화 사업과 국토교통부의 재생사업, 여기에다 미래창조 과학부의 휴먼 ICT 중소기업 창조 생태계 사업에 이르기까지 구미1공단의 재창조를 위해 정부부처가 총 출동할 수 있게 했다.
심의원은 특히 구미1공단 재창조를 위해 2015년도 예산으로 금오테크노벨리 3천6백억원 규모의 국책사업 유치, 구미1공단 혁신단지 지정에 따른 3천억원 집중 투입, 경북 창조 경제 혁신센터 출범에 따른 2천4백억원 규모 투입등 9천억원을 확보했다.
여기에다 구미 첨단산업화를 위한 휴먼 ICT 중소기업 창조 생태계 기반 구축, 전자 의료기기 부품 소재 산업화 기반구축, 초광역연계 3D 융합산업 육성사업, 해외통신 사업자 인증랙 구축, 산학 융합지구 조성사업등을 위한 341억원 규모의 예산을 확보하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 계승작업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국회 동서화합 포럼에 참석한 심의원은 남유진 시장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 유품 전시관을 건립 해 달라고 호소했고, 여야 정치권으로부터 긍정적인 답변을 얻어냈다. 이에따라 2016년 공사가 착공되면 사연많은 과제가 17년만에 해결됐다.
그러나 북구미 IC 신설을 확정짓고, 칠곡 북삼에 KTX를 신설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심의원은 영어(囹圄)의 몸이 됐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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