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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진실화해위원회 재출범, 진실 규명 탄력받는 구미시 시무실(형곡) 미군 폭격기 오폭사건

김경홍 기자 입력 2020/12/11 15:00 수정 2020.12.23 15:00




2010년 6월 말 1기 진실화해위 해체, 시무실 미군 폭격기 오폭사건 진실 규명 작업 중단
시무실 미군 폭격기 오폭사건⇢1950년 8월 16일 130여 명 사망, 수백 명 부상⇢ 1992년 고 이종록(발기인 대표/ 이규원 전 의원 선친)옹 중심 ‘위령탑 건립 추진위원회’ 구성 및 진실 규명 작업 ⇢ 이규원 전 시의원 1기 진실화해위 활동 당시 진실 규명 중추적 역할


↑↑ 1950년 8월 16일 미군 폭격기가 오폭 하면서 130여 명이 희생자를 낸 비극의 현장 구미시 시무실, 지금의 형곡동/ 사진= 이규원 전 시의원 제공



[경북정치신문 = 김경홍 기자]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이 2020년 12월 10일부터 2022년 12월 9일까지 2년간 시행됨에 따라 구미시가 진실화해위원회와 협력해 진실규명 신청·접수 등을 추진하기로 하면서 ‘시무실(형곡) 미군 폭격기 오폭사건’이 또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다.

2012년 2월 8일 5분 발언을 통해 형곡동 오폭사건에 따른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 건립을 촉구한 구미시의회 당시 손홍섭 의원과 이규원 전 시의원에 따르면 시무실 미군 폭격기 오폭 사건은 6.25 전쟁 당시 130호가 사는 산간농촌 지역인 형곡동(시무실, 사창)의 쓰라린 역사였다.

이 지역은 금오산 자락으로 사방이 둘러싸인 지리적인 특수성으로 김천, 칠곡 북삼을 비롯한 사곡, 상모, 임은, 오태, 광평 등 인근 지역에서 피난을 가지 못한 주민들이 피신처로 몰려들 만큼 안전하고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치열했던 1950년 8월 16일 (음력 7월 2일) 오전 10시경, 형곡동 주민들과 피난민들이 더위를 피하기 위해 냇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무렵, 미군 폭격기가 무차별 폭격을 가해 수백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당시 전시 상황은 북한군이 총공세로 임시 수도인 대구 방어선의 함락이 우려되던 때였다. 이에 따라 유엔군은 대구를 사수하기 위해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해 다부동 전투를 전개했고, 북한군은 낙동강 반대쪽에서 대치하고 있었다.

이러한 위급 상황에서 미군의 융단폭격으로 형곡지역 시무실과 사창 등 두 마을은 삽시간에 불바다로 변했고, 이 와중에 형곡동 주민과 피난민 등 130여 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는 비극이 발생했다.

또 당시 피해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고인이 된 마을 주민인 고 김왕개 씨 등 일가족 12명이 사망하고, 고 이종록 씨 일가족 9명도 사망했다. 미군 측의 오폭에 따른 명백한 비극적 사건이었다.

◇비극을 밝혀내기 위한 노력
지울 수 없는 형곡동 오폭사건의 악몽 속에서 살아온 생존 피해자와 그 가족들은 참극이 발생하고 40년이 지난 1992년 고 이종록(발기인 대표/ 이규원 전 의원 선친)옹을 중심으로 ‘위령탑 건립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미국의 미 자도 꺼내지 말라’는 국방부로부터의 회신을 받고 이들은 좌절해야 했다. 이어 2005년에는 구미시에 의견서를 제출하고, 진정서를 냈으나 시정에 반영되지 않았다.

결국 1년 후인 2006년 11월 28일 이규원 전 구미시의회 의원은 진정서 마감 시한을 이틀 앞두고 부랴부랴 진정서를 작성하고, 과거사 정리 기본법에 따라 발족한 과거사위에 자료를 제출했다. 그로부터 2개월 후인 2007년 1월 위령탑 건립 추진위는 오매불망 그리던 ‘결정통지서’를 손에 쥘 수 있었다.

이어 2년 3개월이 흐른 2009년 7월부터 8일까지 진실화해위원회는 조사관을 파견해 2009년 4월7일부터 8일까지 형곡 지구, 인동 유학산 지구, 고아(선산) 지구에 대한 현장 조사를 했다.
사건명은 ‘ 미군 관련 희생 사건, 결정 이유 = 신청사건 다-9042 미군 관련 희생 사건은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 제2조 제1항 제3호의 진실규명범위에 해당하여 조사개시를 결정함’이었다.

시무실(지금의 형곡동) 미군 오폭사건에 대한 현장 조사에서 조사관이 만난 형곡지구 면담자는 생존자와 피해자 가족 등 35명이었다. 더 많은 피해자가 있었지만, 당시 상황을 목격한 주민이나 피해자 가족들이 전국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었기 때문에 현장 조사 대상자는 미군 폭격기의 오폭으로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130여 명에 비해서는 턱없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조사 기간 피해자나 그 가족, 현장을 목격했던 주민들은 기억하기조차 싫은 미군 폭격기 오폭 사건 당시로 되돌아가야 했고, 그 악몽의 세월 속에서 그들은 다시 눈물을 흘려야 했다.

당시 조사관은 전국에 흩어져 있는 관련자들에 대한 추가 조사를 약속하고 돌아갔다. 특히 미군 폭격기의 오폭에 따른 피해와 관련 " 다른 지자체에서는 위령탑 건립 등 피해자들의 원혼을 달래는 노력이 있지만, 구미에는 그마저도 없는 것 같아 애석하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진실화해위가 가동된 당시만 해도 전쟁 과정에서 억울하게 생명을 잃은 피해 주민들에 대해 정부는 1천340억 원의 피해 보상을 할 것으로 알려졌고, 형곡 지구 피해 관련자들 역시 입법발의 중인 법안이 의결되면 보상에 착수할 것으로 기대를 보았으나 결국 무산됐다.

더군다나 2010년 6월에는 2009년 형곡지구를 조사했던 조사관이 타 부서로 옮기면서 업무를 이관받은 다른 조사관이 "1차 조사자를 대상으로 다시 2차 조사를 해야 하겠다"는 통지를 해 왔다. 1년 전 조사한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기억하기조차 싫은 당시 상황을 다시 녹취하겠다고 하자, 당사자들은 오열해야 했다. 하지만 형곡 지구 피해자에게 마음의 상처만을 남긴 진실화해위는 2010년 6월 말 업무를 끝내면서 허망함까지 아픈 가슴 위에 얹혔다.

◇한국 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 희생 사건 진실 규명의 길 열려 
1기 진실화해위원회가 2006년 4월부터 2010년 12월까지 약 4년 7개월간의 활동을 종료하면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 희생 사건은 규명되지 못했다.
하지만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개정으로 2020년 12월 10일부터 2022년 12월 9일까지 2년 동안 재출범한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다시 활동하게 됨에 따라 미규명된 형곡(시무실) 미군 폭격기 오폭 사건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 희생사건 등은 진실규명의 길이 다시 만나게 됐다. 따라서 희생자·피해자 및 유족의 아픔을 위로하고 나아가 암울한 과거의 역사를 넘어 새로운 미래로 나가기 위한 국민통합에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신청 자격은 진실규명 사건의 범위에 해당되는 희생자나 피해자 또는 유가족뿐만 아니라 진실규명 사건을 경험 또는 목격한 자이거나 이를 경험 또는 목격한 자로부터 직접 전해 들은 자가 개별적 또는 단체로 신청할 수 있다.

진실규명 신청 기간은 2020년 12월 10일부터 2022년 12월 9일까지 2년이다. 신청서는 진실화해위원회(www.jinsil.go.kr)에서 다운받을 수 있으며 주소지에 관계없이 시·군·구청이나 시·도 또는 서울에 소재하고 있는 진실화해 진상규명위원회(☎02-3393-9700)에 직접 방문하여 제출하거나 우편 등을 이용하여 접수할 수 있다.

◇구미, 김천지역 미국 오폭 사건 및 양민학살 사건
▶ 선산, 구포동 미군 폭격기 오폭 사건

1950년 8월 16일(음력 7월 2일) 미군 폭격기의 오폭에 따른 구미시 시무실(사창마을), 지금의 형곡동을 맹폭하면서 1백 수십 명의 목숨을 앗아간 비극 이외에도 시 관내 타지역과 이웃해 있는 시군에도 이와 유사한 비극이 발생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게다가 6.25 당시 민간인 학살사건의 비극 역시 발생했던 것으로 알려져 이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동시에 영혼을 추모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6.25전쟁을 전후해 미군 폭격기의 오폭사건으로 비극을 겪어야 했던 곳은 형곡동을 비롯해 선산 송림동, 구포동, 김천시 농소면 봉곡리 등이었다.

경북도의회 특위 보고서(2000년)에 따르면 형곡동(시무실)은 1950년 8월 16일 미국 폭격으로 130여 명이 사망했다. 또 전민특위 공동 백서에 따르면 선산읍 송림동에서도 1950년 8월 31일, 미군 폭격으로 38명이 사망했다.

또 1950년 음력 7월 2일에는 미군기가 마을로부터 4킬로미터 떨어진 금전동 앞 하천에서 피난 생활을 하는 주민 50여 명에게 총을 쏘면서 18명이 사망했다. 이외에도 도로변의 피난 행렬도 미군기의 폭격을 받아 5~6명의 희생자를 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950년 7월 25일에는 또 폭격기 2대가 피난민 수천 명이 생활하는 김천시 남면 연봉 천 냇가에 기관총을 발사해 희생자를 발생시켰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와 함께 미 1 기갑 사단장 호바트 게이 소장과 일부 장교들이 칠곡군 왜관교 폭파 명령으로 다리가 폭파하면서 어린이와 여성 등 많은 피난민이 살해되거나 익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양민 학살 사건
양민 학살 사건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60년 6월 28일 자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양민 학살자 신고 기간 중 당시 선산에서도 100여 명이 신고했다. 이들은 주로 1950년 8월 1차 후퇴 때 경찰에 의해 학살당했거나, 북진 당시 군인에 의해 학살된 양민이었다.

희생된 이들은 농민 69명, 공업 4명, 상업 6명, 공무원 3명, 기타 학생과 무직 등이었다. 이러한 비극을 알고 있는 유족들은 여러 차례 당시의 사찰 형사에게 학살 날짜라도 알려달라고 하소연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동아일보는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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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선산읍 이문리에서도 피난을 갔다가 너무 일찍 돌아왔다는 이유로 군인이 마을 사람 20~30명을 총살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구미시 법성사 인근에서도 억울한 양민학살 사건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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