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울풍경/ 사진 = 카페 ‘행복한 천사’ 켑처 |
[데스크 칼럼= 발행인 김경홍] 영원불멸의 현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절대권력도 매한가지다.
‘짐은 곧 국가다’라고 할 만큼 절대 권력자인 프랑스 루이 14세도 결국은 망했고, ‘힘이 곧 정의’라고 자임해온 독재 권력도 결국은 그 길을 갔다.
절대권력으로부터 독재 시대를 뛰어넘어 민주사회로의 힘이 이동하기까지는 이름 없는 민중들 이른바 사회적 약자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태생한 것이 바로 민주 정부 (문민정부)가 아니었던가.
문재인 정부 탄생 역시 그 토대가 사회적 약자들이었다는 점에서 맥락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문재인 정부가 추구하는 ‘정의와 공정’이 사회적, 경제적 약자를 위한 ‘외침’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최근 들어 변창흠 국토교통부 장관 후보자와 이용구 법무차관의 행적이 이슈를 장식하고 있다.
국민의힘 김은혜 의원에 따르면 구의역 김 군 사망 사고와 관련해 2016년 6월 30일 열린 건설 안전 사업본부 부장 회의에서 “사실 아무것도 아닌데 걔(구의역 김 군)만 조금만 신경 썼었으면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될 수 있었는데 이만큼 된 거잖아요”라고 발언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고 있다.
그는 또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해 주겠다는 내용의 공고를 하고 채용한 4·5급 상당의 마케팅 전문가들에게 기존 업무를 이어가도록 하겠다는 무기계약직 전환 약속을 어기기까지 했다.
이용구 법무부 차관 역시 변호사로 일하던 지난달 초 밤늦은 시간 서초구의 한 아파트 앞에서 술에 취한 자신을 깨우는 택시 기사의 멱살을 잡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보도에 따르면 경찰은 반의사불벌죄인 ‘단순폭행죄’ 처리 방침에 따라 이 차관을 형사 입건하지 않고 사건을 내사 종결 처리했다.
약자에게 약하고, 강자에게 강해야 ‘정의와 공정’이 비롯되는 법이다.
사회적 약자를 위하는 가치관을 지니고 있었더라면 변 후보자는 소중한 생명의 희생 앞에서 그 책임을 타인에게 미루려고 하기보다 스스로 책임을 통감하는 자세를 보여주었을 것이다.
이 차관도 마찬가지다. 몰아닥친 코로나 19 한파로 생사를 넘나들 듯 하루하루를 버텨나가는 택시 기사가 잠든 자신을 깨운다는 이유로 멱살을 부여잡았다는 것은 법적 문제를 떠나 인륜적 차원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행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17일 영국의 데일리메일은 시베리아 라스노야르스크주의 한 주민이 눈 속에서 발견한 아기 강아지 7마리와 어미 개의 사진을 보도했다. 생후 한두 달이 채 안 돼 보이는 아기 강아지들은 얼어 죽은 어미 품에 꼭 안겨있었다.
그 한 장의 사진이 감동을 더 해주는 것은 영하 20도가 넘는 혹한 속에서 어미 개는 사경을 헤매면서도 새끼들을 추위로부터 지키기 위해 꼭 끌어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약자에게 권력은 자신의 생명을 지켜주고 삶을 행복하게 해 주는 파수꾼이 될 수 있고, 생존권을 짓밟는 억압자가 될 수도 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해 ‘모정의 사랑’을 쏟는 관료들을 만나고 싶다. 생사의 갈림길을 가면서도 강아지를 품어 안은 한파 속의 어미 개처럼 약자들의 가슴을 감동으로 물 들이는 관료들을 만나기 힘든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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