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서울 관악구 총선에서 이해찬, 김종인 격돌/ 2016년 김종인 비대위에 의해 이해찬 대표 공전 배제/ 2020년 민주당, 통합당 공동 총괄선대위원장으로 재격돌/ 21대 국회 집권여당, 제1야당 대표로서 맞대결/
↑↑ 경북 상주 인근 낙동강 전경. 사진=불로그 가을단풍 캡처 |
[경북정치신문=김경홍 기자] 총선 직후 A모 언론은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조만간 사의(辭意)를 표명할 것이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이를 계기로 사의설은 들불처럼 확산해 나갔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아 보도 내용이 추측성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지난 11일 오전 민주당 공보실이 ‘이해찬 대표 총선 직후 사의 표명 및 조기 전대 불가피’ 관련 보도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며, 사의설을 일축했다. 당헌 당규에 따라 임기 만료일인 8월 24일까지 직을 유지하게 된다는 얘기였다. 헤프닝이었다.
당 대표의 사의설로 술렁이던 집권 여당이 침묵 무드로 가라앉자, 제1야당인 미래통합당이 비대위원장 임명을 앞두고 굉음을 쏟아냈다, 주호영 원내대표가 김종인 전 공동선대위원장을 내정했지만, 임기와 역할을 놓고 찬반양론이 맞서면서 통합당은 이른바 ‘바람 잘 날 없는 가지 많은 나무’가 됐다.
하지만 당선자들은 총회에서 압도적 찬성으로 김종인 비대위에 힘을 실었고, 막강한 원군을 등에 업은 주 원내대표는 김 내정자를 만나 ‘재•보궐 선거가 실시되는 내년 4월 7일까지를 임기’로 제시하면서 비대위원장직 수락을 요청했다.
이에 대해 김 내정자는 ‘ 당을 살리고 나라를 살리는 데 온 힘을 쏟겠다’고 화답했다.
이로써 민주당 현 대표의 임기가 만료되는 8월 24일까지 이해찬 대표와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은 집권 여당과 제1 야당의 대표 장수로서 정치 전선에서 맞서는 상황을 피해 갈 수 없게 됐다.
두 인사만큼 얽히고 설킨 정치사의 인연도 없을 것이다. 한때는 한배를 탄 동지로서 등을 맞댔고, 또 한때는 승자와 패자로서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특히 이들 두 인사의 관계는 태풍 속의 파도처럼 요동치는 현대 정치사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씁쓸한 맛을 자아내기도 한다.
경행록을 들여다보면 가슴을 울리는 글귀가 있다.
은의(恩義)를 광시(廣施)하라, 인생하처(人生何處)에 불상봉(不相逢)이리오,
수원(讐怨)을 막결(莫結)하라, 로봉협처(路逢狹處)면 난회피(難回避)니라.
은의를 널리 베풀어라. 사람이 어디에 산들 서로 만나지 않겠는가? 원수와 원망을 맺지 마라. 길이 좁은 곳에서 만나면 피하기 어렵다.
이해찬 민주당 대표와 미래통합당 김종인 비대위원장의 피할 수 없는 만남을 목전에 두고 이런 글귀가 주마등처럼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 이해찬 ‘부당한 것에 굴복하는 사람 아니다. 불의에 타협하는 인생을 살지 않았다’
이해찬 대표와 김종인 비대위원장 내정자의 인연은 1988년 제13대 총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 평민당 후보였던 이 대표는 민정당 김종인 후보와 맞대결을 벌였다. 결과는 이 대표의 승리였다. 반면 김 내정자는 27.13%라는 초라한 성적표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다.
↑↑ 3월 25일 21대 총선을 앞두고 최고위원회 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 사진 = 더불어민주당 캡처 |
그로부터 16년 후인 2004년에는 김 내정자가 새천년민주당 제17대 총선 선거 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으며 상봉을 했다.
이어 2012년 박근혜 대선 경선 캠프 국민행복추진위원회의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을 맡으면서 헤어진 두 인사는 4년 후인 김 내정자가 2016년 20대 총선을 진두지휘할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를 맡아 공천을 주도하면서 다시 상봉하게 됐다.
1988년 제13대 총선에서 이해찬 대표에게 패했던 김 내정자가 28년이 흐른 2016년 총선에서는 공천권을 휘두르는 상석을 차지하고 앉은 것이다. 정치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우려했던 데로 김 내정자의 예봉(銳鋒)은 이해찬 대표를 비껴가지 않았다.
김종인 비대위가 이 해찬 대표를 후보 공천에서 배제한 것이다. 이 대표의 공천 배제 불복 및 무소속 출마가 현실화하면서 공천을 둘러싼 당내 갈등도 격화하는 등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격앙한 당시 이 대표는 김 내정자의 결정을 정면 반박하고 나섰다.
“김종인 비대위는 정무적 판단이라고 어물쩍 넘어가려 한다. 정치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공당의 결정은 명분이 있어야 한다. 합의된 방식에 따라 결과에 승복할 수 있는 절차가 있어야 한다. 이렇게는 안 된다. 저는 부당한 것에 굴복하는 사람이 아니다. 저 이해찬은 불의에 타협하는 인생을 살지 않았다. 이제 잠시 제 영혼과 같은 더불어민주당을 떠나려고 한다. 이번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하겠으며, 세종시 완성과 정권 교체를 위해 돌아오겠다”
결국 세종시 총선에서 승리하고 더불어민주당으로 복귀한 이 대표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 여파로 앞당겨 실시한 2017년 3월 16일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 후보를 당선시키는 메이커 역할을 하면서 정권 교체의 꿈을 이뤄냈다.
↑↑ 4월 16일 김종인 총괄선대위원장이 서울 여의도 국회 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사진 =미래통합당 캡처 |
김종인 비대위에 의한 공천배제와 무소속 출마 당선, 더불어민주당 복귀, 정권 교체 등 이 대표가 청신호가 켜진 도로를 쾌속 주행하는 동안 2016년 3월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2번으로 결정되면서 셀프 공천 논란의 중심에 섰던 김 내정자는 20대 총선이 끝난 후 당 대표직 추대론이 불거지면서 운신의 폭이 좁혀들었다. 결국 당내 반발을 수습하는 데 힘의 한계를 절감한 그는 더불어민주당을 떠나야 했다.
그로부터 4년 후 실시한 21대 총선에서 두 인사는 더불어민주당과 미래통합당 공동 총괄선대위원장으로서 대척점에 서야 했고, 더불어민주당이 180석을 얻으면서 대승을 거둔 반면 미래통합당은 83석이라는 초라한 성적표 앞에서 고개를 숙여야 했다.
사실상 개인 이해찬 대표는 1988년 제13대 관악구 총선 승리, 2016년 제20대 총선에서 김종인 비대위에 의한 공천 배제에 반발해 무소속 출마 당선, 공동선대위원장으로서 2020년 제21대 청선 압승 등 김종인 내정자와 맞대결에서 사실상 3전 3승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종인 대표 역시 전두환 정권의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 노태우 정권의 민자당 비례대표, 2004년 새천년 민주당 공동 선거대책위원장, 2012년 박근혜 대선 경선 캠프 국민행행복추진위원회의 선거 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 2016년 더불어민주당 20대 총선 비상대책위원회 대표, 2020년 미래통합당 총선 공동선거대책위원장 등 여야를 넘나들며 킹메이커 역할론에서는 성공했다는 평을 얻고 있다.
하지만 이해찬 대표와의 맞대결에서는 종종 얼굴을 붉히며 등을 돌려야 했던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 내정자.
이제 이해찬과 김종인은 거대여당 대표와 몸집이 야윈 미래통합당 비대위원장의 직함을 달고 만나면 피하기 어려운 길목에 서 있다.
과연, 두 인사가 겉으로는 으르렁대는 모습이었지만, 속내는 은의를 널리 베풀었겠는가. 새삼 경행록이 가르침이 가슴을 때린다.
“은의(恩義)를 광시(廣施)하라, 인생하처(人生何處)에 불상봉(不相逢)이리오,
수원 (讐怨)을 막결(莫結)하라, 로봉협처 (路逢狹處)면 난회피(難回避)니라.
은의를 널리 베풀어라. 사람이 어디에 산들 서로 만나지 않겠는가? 원수와 원망을 맺지 마라. 길이 좁은 곳에서 만나면 피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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