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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정치신문

어느덧 11주기> 정치 명운 내걸고 4공단 일으켜 세운 ..
기획·연재

어느덧 11주기> 정치 명운 내걸고 4공단 일으켜 세운 박세직 전 국회의원

김경홍 기자 입력 2020/07/13 19:26 수정 2020.07.13 19:26



 
국민회의와 공동정부 구성한 자민련 입당
김대중 대통령•김종필 총재 핫라인 활용, 백지화 위기의 4공단 착공
4공단 착공식 예정에 없던 김대중 대통령 참석, 기지 발휘
중앙 정치력의 위력, 입증시킨 구미 정치인
위기의 구미공단, 일으켜 세울 2세대 정치인은 과연 누구

↑↑ 구미시가 2015년 12월 10일 올림픽 기념 국민 생활관에서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와 국가 발전을 위해 헌신한 故 박세직 조직위원장을 기리는 기념 전시실 재 개관식을 가졌다./ 사진 = 구미시 제공


[경북정치신문=김경홍 기자]  세월은 마치 흐르는 강물과 같다. 2009년 7월 27일, 76세를 일기로 구미 현대 정치사에 큰 족적을 남긴 박세직 전 국회의원이 세상을 뜬 지가 엊그제 같은 데 어느덧 11주기를 목전에 두고 있다. ‘권불십년이요, 화무십일홍’ 이 새삼스럽다.

2003년 12월 15일 신장암으로 파란만장의 삶을 마감한 허주 김윤환 전 의원에 이어 6년 후인 2009년 박 전 의원의 영면하자, 구미 정치 1세대가 막을 내렸다는 정치사적 의미가 부여됐다.
그렇다면 한국 정치의 중심에서 위세를 떨치며 구미공단을 정상 궤도에 올려놓은 1세대의 바톤을 이어받은 김태환 •김성조 전 의원을 위시한 정치 2세대들은 어떤 족적을 남겼고, 이후 정치인들은 또 어느 곳을 향해 가고 있는가.

이 나라 산업화의 상징인 구미공단은 지금, 호황기의 추억을 곱씹으며 길고 긴 침체의 터널 속에 갇혀 있다. 그래서 공단의 처한 현실의 중심에 서 있는 정치 2세대들의 현주소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박세적 전 의원이 간절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이유다.

↑↑ 1988년 서울에서 열린 올림픽 대회에서 조직위원장을 맡은 박세직 전 의원이 개회사를 하고 있다. / 사진 = 서울올림픽 자료실 캡처


◇ 4공단 착공식에 예정에 없던 김대중 대통령 참석시킨 정치력
기자가 박세직 전 의원을 독대한 것은 재선의원으로 당선되고 2년 후인 1998년 4월 3일이었다.
1991년 2개월 만에 서울시장직을 사직하고 1년 후인 1992년, 민주자유당 구미시 지구당 위원장으로 임명되는 것을 계기로 정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박 전 의원은 그해 실시한 14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이어 1996년 실시한 15대 총선에서 역시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면서 재선의원으로서 탄탄한 정치 입지를 다져놓고 있던 그였다.

그날 구미시 송정동 모 한정식 식당에서 마주 앉은 박 전 의원은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혹시 내가 말일세 신한국당 (미래통합당 전신)을 탈당하면 시민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구미경제도 말이 아니잖아. 4공단 조성계획은 잡혀 있지만, 수년 때 한 발짝도 내딛질 못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야. 좋은 의견이 있으면 후일에 조언을 좀 해주면 좋겠어”
더 큰 충격은 그날 오후 3시 긴급 뉴스였다. 각 방송사가 ‘박세직 의원이 신한국당을 탈당하고, 부총재의 자격으로 자민련에 입당했다“는 보도를 내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기자와 만난 박 전 의원은 이미 자민련 입당을 결정한 상태였고, 지역언론에는 그 사실을 은유적으로 알렸던 것이다. 그 무렵 중앙 정치는 요동치고 있었다. 중진의 김종호 의원은 박 의원과 함께 자민련에 입당했고, 그해 6월 11일에는 자민련과 공동정부 체제를 유지하고 있던 구미 출신 박재홍 의원과 최기선 인천시장이 국민회의로 적을 옮겼다.

박세직 의원의 신한국당 탈당으로 구미 정가 역시 크게 술렁거렸다. 동조한 주요 당직자, 도의원과 시의원들이 신한국당을 탈당해 자민련으로 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을 지역의 일부 시의원과 정보호 도의원 등은 신한국당에 남아 있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기도 했다.
그러나 가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보수 성향의 시민들을 중심으로 비판 여론이 확산해 나갔고, 박 전 의원을 비롯한 탈당파들은 피폐화하는 구미공단 재건을 앞세우고 민심을 다독여나갔다.

사실, 국민회의 집권 당시의 구미공단 사정은 말이 아니었다. OB 맥주 공장이 광주로 이전되는 것을 시작으로 공동화의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때문에 1996년 9월 30일 3공단 조성을 끝으로 쇠락의 길로 들어서는 공단을 지켜보는 구미시민들의 절절한 소원은 4공단 조성이었다, 그러나 기존 공단이 공동화하는 상황에서 4공단 착공은 엄두를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수자원 공사가 정부 차원의 획기적인 재정지원이 없으면 자력으로 4공단을 조성할 수 없다고 공언하면서 희망의 프로젝트는 백지화 위기로 내몰렸댜.

이처럼 구미공단 상황이 악화일로로 치닫자, 시민들은 ‘구미경제 살리기 비상대책위’를 구성해 가동했고, 자민련 부총재를 맡고 있던 박세직 의원은 당시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 김대중 대통령의 핫라인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4공단 조성을 위한 수순을 용의주도하게 밟아나갔다.

특히 4공단 조성에 정치의 명운을 걸다시피 한 박 의원은 4공단 착공식 당일 대구에 내려와 있던 김대중 대통령을 구미4공단 착공식에 참석시키는 기지를 발휘하면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당초, 4공단 착공식 당일 김대중 대통령은 대구 행사를 마치고 귀경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박 세직 의원은 대통령 비서진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김종필 총재 핫라인을 활용해 예정에 없던 대통령의 4공단 착공식 참석을 성사시킨 것이다. 구미에 대한 깊은 애착이 만들어낸 역사적인 작품이었다.

박 세직 전 의원을 보필했던 보좌진들은 일화 한 토막을 이렇게 들려주고 있다.
"하루 4시간 이상 잠자는 법이 없었다. 잠자는 시간은 곧 죽는 시간이라고 말씀하시던 그분은 차량을 이용하는 동안에도 이고 저곳으로 전화를 걸어 구미공단에 관심을 가져달라는 부탁하기에 바빴다“

박세직 전 의원의 정치 행보에 대해 당시 일각에서는 입신출세를 위해 소신을 지키지 못했다는 비판을 하기도 했지만, 훗날 많은 시민은 구미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려고 한 정치인으로 평가했다.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비롯된 구미공단은 이 나라 산업화의 기념비적 존재가치이며, 지금의 정치인들은 ‘구미공단을 재도약 시켜야 한다’는 시대적 과제를 부여받고 있다. 이 막중한 과제를 풀 주인공은 과연 누구일까. 난세에 영웅이 탄생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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